[삶의 향기] 세상 기준과 영혼의 때를 위한 가치

등록날짜 [ 2015-11-24 22:35:06 ]

친여동생에게도 말 못할 고민을 안고 며칠 끙끙거렸더니 방광염이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동생이 물어도 “별거 아니다”고만 했더니 나름 내게 질문을 던져 추측하기에 나선다.

 

동생이 태연히 던진 첫마디는 “누가 아파트 샀대?”였다. 어이가 없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누가 딸 가졌대? 아니면 부모님이 뭐 좀 해 줬대?”라고 물었다. “너는 이 언니를 어떻게 보는 것이냐?”며 화를 냈더니 “넌 누가 잘되면 우울해하잖아”라고 한다.

 

얼굴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있는지 단박에 아는 친자매간이라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쁘기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물론 내 고민거리는 그런 것과 전혀 거리가 멀었지만 동생 말을 듣고 내게 그런 면이 있었던가 싶고, 내 언행심사를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무지를 깨치게 할 나단 선지자는 가까이에 있다’고 하더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 그게 바로 나였나 보다.

 

고등학교 때 가세가 많이 기울어 온갖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면서도 동기들이 내가 부잣집 딸인 줄 알 만큼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 강남에 땅은 없어도 내 고향 거제도 산달섬에 밭뙈기는 쪼매 있다”고 너스레를 떨 만큼 못 가진 것에 위축되지 않았다.

 

결혼 전만 해도 위풍당당하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돈의 무게에 눌리고, 가끔 방문하는 남의 집 평수와 화려한 세간에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워 괜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걸까?’부터 ‘지방에 내려가면 살림살이가 더 여유 있을 텐데’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육신의 정욕으로 살지 말고 영혼의 때를 위해 살라”는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이 괜찮아졌다가, 그냥 요즘 다들 뭐 하고 사나 싶어 들어간 친구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보고는 와장창 무너졌다.

 

해외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사진부터 결혼 몇 주년을 맞아 남편이 명품 가방을 선물했다는 얘기, 가족끼리 오붓하게 맛집을 찾았다는 인증샷까지. 그중 단연 최고는 결혼기념일에 해외여행을 갔는데 남편이 침대에 장미꽃잎을 뿌려 놓았더라는 사진과 글이었다. 그 글을 보고 난 뒤 자고 있는 남편의 등짝을 후려칠 뻔했다. 그 뒤로 나는 내 SNS에 다른 사람이 보고 위화감을 느낄 만한 사진은 올리지 않는다.

 

어찌 됐든 나의 가치관이 어느새 세속적이고 정욕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나이가 들었고 세파에 시달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는 핑계다. 현재 내 지성은 세상적인 가치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고, 내 감정은 진짜 발동해야 할 때 발동하지 못하고 발동하지 말아야 할 때는 어김없이 발동한다.

 

또 내 의지는 영혼의 때를 위한 일에는 박약(薄弱)이요, 육신의 일에는 굳세다. 나는 정말 대략 난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요즘 내 기도 제목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정·의가 살아나는 것, 세속에 찌들대로 찌든 내 가치관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 내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늘 나는 교회 신문 <삶의 향기> 코너에 ‘향기’ 대신 ‘냄새’를 피웠다. 부끄러운 이 냄새가 곧 주님의 향기로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내 간절한 마음을 들으시고 일하실 주님을 기대한다.

김은혜 집사

(75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6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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