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바이블아카데미(YBA) ‘로마서 통독(리더자 양성과정)’ -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등록날짜 [ 2026-06-30 11:40:49 ]
6·25 전쟁 이후 70여 년 지났지만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은 변함없고
고도화된 핵무기 위협은 날로 심각
1950년 우리를 침략한 그 정권이
핵을 손에 쥐고 실전으로 단련되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게 우리의 현실
70여 년 전 피로 지킨 대한민국을
보전할 방어선은 ‘잊지 않는 것’
스스로 강해지고 동맹을 유지하고
휴전선 너머의 위협 계속 경계해야
6월이 저문다. 70여 년 전 ‘6·25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의 날짜마저 달력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해마다 ‘기념’하는 그 전쟁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난 적이 없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서명된 것은 ‘정전협정’이었다. 글자 그대로 ‘잠시 멈춤’이다. 평화조약은 72년이 지나도록 없었으며, 법적으로 한반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시(戰時)이다.
군사전문가 양욱은 『위대한 전쟁 위대한 전술』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좌표를 한 문장으로 짚는다. “우리는 세계에서 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땅에 살고 있다.” 분단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핵 보유를 선언한 정권과 마주한 나라 대한민국. 그 정전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 부르며 막연히 살아간다.
모호한 약속이 가져온 예기된 침략
6·25 전쟁을 흔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남침은 소련과 중국의 승인 및 참전 약속 등으로 이미 ‘준비된 침략’이었고 처음부터 ‘국제전’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다. 남침 구상을 설명했고, 스탈린에게 승인을 받았다. 이후 소련은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상주시키며 전쟁 준비를 도왔다. 김일성은 중국 베이징의 마오쩌둥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만일의 경우 중공군을 지원해 줄 것을 미리 요청했다.
북한이 남침을 저지를 빌미는 반년 전에 깔렸다. 1950년 1월, 미국이 태평양 방위선을 그으며 한반도를 그 바깥에 둔 것이다. 바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주장으로 극동 방위선에서 대한민국이 제외되었고, 이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신호를 모스크바와 평양은 정확히 읽었다. 약속이 모호해진 자리에 침략이 들어섰다.
남침 작전의 핵심은 속도였다. 선전포고 같은 절차는 처음부터 없었다. 인민군을 총동원해 38선 전역에서 동시에 밀고 내려가, 방어선을 세울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끝낸다는 구상이었다. 북한군은 소련이 공급한 T-34 전차를 앞세웠고, 국군에는 맞설 전차가 한 대도 없었다.

<사진설명>6.25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도심을 질주하는 북한의 T-34 전차. 북한군은 소련이 공급한 전차를 앞세웠고, 대한민국 국군에는 이를 맞설 전차가 한 대도 없었다.
남침계획서에는 “개전과 동시에 부산 점령”이 명기되어 있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한반도 최남단 항구를 장악하면,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발 디딜 곳 자체가 사라진다는 계산이었다.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된 침략 앞에 선 나라는, 갓 두 살이었다.
빈손으로 막은 나라
1950년, 그 당시 국군은 군대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만 29세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던 제1보병사단은 병력이 1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부대를 이동시킬 트럭조차 없었다. 인원도, 화력도 미군과는 견줄 수 없었다.
바다의 사정은 더 참담했다. 당시 해군이 가진 배는 함포 한 문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잡역선과 증기선 그리고 상륙용 주정 수준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의 해군이 그러했다.
전투함이 필요했다. 대한민국에는 군함을 사들일 돈이 없었으나, 감사하게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에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과 장병들이 월급의 일부를 떼어 군함 구매를 위한 성금을 모았다. 해군 부인회도 바자회를 열고 삯바느질로 돈을 보탰다. 모금은 일반 국민에게로 번져 몇 달 만에 1만 5000달러가 모였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예산에서 4만 5000달러를 더했다.
그렇게 마련한 6만 달러로 손원일은 미국에서 퇴역한 구잠함(軀潛艦) 한 척을 1만 8000달러에 사들이고 함포를 얹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PC-701 백두산함이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 배에 실린 포탄은 겨우 100발이었다.
<사진설명>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 당시 손원일 제독과 해군 그리고 해군 가족들이 모금해 구입한 배이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50년 6월 25일 밤, 완전 무장한 북한군 수백 명을 태운 수송선이 발견되었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부산이 뚫리면 전방과 후방이 동시에 무너지고 나라 전체가 끝난다는 것을 승조원들은 알고 있었다. 포탄 100발을 실은 백두산함이 부산 앞바다로 나섰다. 5시간 넘는 추격과 포격 끝에 적선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개전 첫날 밤, 대한해협에서 있었던 첫 승리였다.
뭍에서는 스물아홉 살인 사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임진강에서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적의 발을 묶었다. 대구 앞 다부동에서는 30일 넘게 고지의 주인이 매일 바뀌는 혈전이 이어졌다. 탄약이 바닥나면 백병전이 벌어졌고, 능선 하나를 두고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1사단은 끝내 다부동을 내주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지구촌 16국의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렸다. 이들이 지킨 진영은 한반도의 전선이자 자유세계의 전선이었다.
낙동강에서 가까스로 버티던 9월, 전세가 뒤집혔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적의 허리를 노려 인천을 택했다. 무모한 선택이라는 반대가 빗발쳤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손꼽히게 컸고, 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 상륙정이 닿을 시간은 하루 몇 시간뿐이었다. 성공 확률을 5000분의 1로 본다는 말까지 나왔다.
상륙 전야, 한국인 첩보대가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어둠 속 함대의 뱃길을 열었다. 1950년 9월 15일, 상륙은 성공했고 전쟁의 물길이 바뀌었다.

<사진설명>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
이후 3년간의 전쟁에서 국군은 13만 명 넘게 전사했고, 유엔군도 4만 명 가까이 스러졌다. 민간인까지 더하면 한국인 사망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진 수많은 이와 헤아릴 수 없는 무덤이 두 살짜리 나라를 떠받쳤다.
그 빈손의 무게만으로 이 생존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트럭 한 대 없던 사단이 한 달을 버텼고, 5000분의 1 확률이라던 상륙작전이 성공했으며, 지도에서 지워질 뻔한 나라가 끝내 살아남았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전쟁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의 손길을 읽어 왔다. 믿음은 막연하게 손을 놓는 구실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신다는 고백과, 그 역사 안에서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다짐은 한 뿌리에서 자란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셈법은 익숙하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골고다에서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보배로운 피, 그 대속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이 값없이 우리를 건졌다. 받을 자격 없는 자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신앙의 바닥에는 그것이 있다. 그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사진설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남북 간에 전쟁은 멈췄으나, 한반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적으로 전시(戰時)에 해당된다.
1950년의 적은 그대로다
여기까지는 70년 전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때 자유를 짓밟으려던 진영이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데 있다.
1950년 북한의 등 뒤에는 소련과 중국이 있었다. 2026년, 현재에는 그 북한이 러시아의 등을 떠받친다. 북한은 지난 2024년 6월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었다. 사실상의 군사동맹이다. 그 조약에 따라 1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전선에 보냈고, 공병까지 파견했다. 사상자가 수천 명이 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간담을 더 서늘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전쟁 실험장’으로 쓰고 있다고 본다. 드론과 전자전 그리고 현대 포병 전술을 실전에서 익힌 병력과 교관이 돌아오면, 그 경험은 고스란히 휴전선 이남을 겨누게 된다. 1950년 우리를 침략한 그 정권이, 핵을 손에 쥐고 실전으로 단련되어 다시 서 있다.
세계는 그런 정권을 어떻게 다루는가. 2025년 6월,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의 핵시설을 폭격했다. 불법 핵개발을 저지하려는 자유 진영의 응답이었다. 2026년 2월에는 이란 전역을 타격해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비롯한 수뇌부를 제거했다. 자유 세계는 적대 정권의 핵무장을 끝내 용인하지 않았다.
이란과 북한은 닮은 정권이다. 체제를 지키려 핵에 매달리고, 자유 진영을 적으로 돌린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이란은 바다 건너에 있었고, 그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휴전선 바로 너머에 있고, 그 핵은 이미 완성돼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이다. 힘이 결정하고, 약속은 힘이 뒷받침할 때에만 약속이 된다. 70년 전 애치슨 라인이 가르친 것도 같다. 모호함은 침략을 부르고, 빈틈은 반드시 시험당한다. 자유 국가의 선택은 복잡하지 않다. 스스로 강해지고, 동맹을 단단히 하고, 평화를 선언이 아니라 억지력으로 떠받치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마지막 방어선
1948년에 세운 자유민주공화국을 1950년에 피로 지켰다. 우리가 지킨 것은 한 뼘의 영토가 아니라 그 체제였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이 ‘잊힌 전쟁’이 되어 간다”라고 적었다. 번영이 깊어질수록 그것을 떠받친 희생은 흐려진다. 자기를 던져 공동체를 구한 이들을 잊은 나라는, 다음 위기에서 누구에게도 헌신을 요구할 수 없다.
스물아홉 살 사단장과 포탄 100발짜리 배는 박물관 유리장에 갇혀 있지 않다. 핵을 쥔 적대 정권을 목전에 두고,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질서 한가운데 선 우리에게, 1950년의 기억은 오늘을 읽는 지도이다.
기억하는 일이 곧 지키는 일이다. 정전 체제는 72년째 그대로이고, 휴전선 너머의 위협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그 앞에서 기억은 가장 값싼 무기이자 마지막 방어선이다. 우리가 어떤 선택 위에 서 있는지, 그 여름의 바다와 고지가 지금도 묻고 있다.

<사진설명>서울시는 지난 5월 광화문광장과 지하에 6.25 전쟁에 참여한 나라에 대한 감사를 담아 조형물을 설치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5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