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성서의 땅을 가다’(178)] 화려한 세속 문화에 젖어 주님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터키 편 (16)

등록날짜 [ 2020-02-11 12:45:35 ]

물질의 번영과 영적 축복을 받은 초대 교인들

믿음의 중심을 놓쳐 촛대 옮긴다는 경고 받아

사도 요한과 예수 모친 마리아가 여생 보내고

사도 바울이 3년간 복음 사역한 성서의 땅

 

윤석전 목사:클레오파트라 여왕 이후, 지중해에서 가장 으뜸가는 도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Ephesus)로 옮겨졌습니다. 해안 도시 에베소는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여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곳에서 여생(餘生)을 보냈고, 사도 바울도 이곳에서 3년간 복음을 전하며 사역했습니다. 물질의 번영과 영적 축복을 받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주님께첫사랑을 잃었다(2:4), 회개치 아니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싸우리라’(2:16)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왜 첫사랑을 잃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에베소 유적지로 가 보겠습니다.

 

에베소는 서머나에서 남쪽으로 50km 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적 입구에는 로마 도미티아누스(Domitian, A.D. 51~96) 황제 신전이 있다. 이곳에 있는 건축물과 조각들은 수준이 높아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내려가면 A.D. 1세기에 세운 민간 아고라(Agora, 시장)를 볼 수 있다. 과거 이곳은 세계 각국 상인이 온갖 상품을 거래하던 동양 최대의 시장이었다. 에베소 원형극장은 터키에 남아 있는 고대 극장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에베소의 과거 풍요로움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1964년에 발굴돼 현재까지 복원 중인 이곳은 관중석, 무대, 합창석까지 갖췄다. 화려했던 도시 에베소의 교인들은 결국 믿음의 중심을 놓쳤고, 하나님께 첫사랑을 잃었다는 무서운 책망을 받는다.

 

윤석전 목사:장엄한 도시와 엄청난 거리를 보면서 그 시대의 문명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베소의 지리와 역사적 특징을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교수:에게해(Aegean Sea)는 소아시아 반도의 서해안과 크레타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 해역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에게해 연안에 있습니다. 7대 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해안 지역에 있었고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가 중요한 이유는 지리적 특성 덕분이기도 합니다. 에베소는 카이스트로스강(Caystrus)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며 해상교통이 발달했습니다. 사데 교회로 연결되는 육상교통은 당시 국제 도로인왕의 길(King’s Road)’과 이어져 중요합니다. 에베소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에 자주 점령당해 식민지화했고 한때 고레스(Cyrus)와 알렉산더(Alexander)도 에베소를 점령했습니다. B.C. 190년경 로마가 에베소를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에베소는 문학·철학·예술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종교 중심지여서 성경에도 언급한 아데미신전(19:27)이 있습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로 분류된 아데미신전은 현재 기둥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로마 지배 아래 있던 에베소의 인구는 어림잡아 30만 명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당시 에베소는 세계적인 도시였고 사도 바울도 3년이나 머물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다는 점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있던 곳이기도 해 역사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기독교 유적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었기에 책망받았습니다. 그들이 첫사랑을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영철 교수:우리가 처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도 칭찬받을 일을 많이 했지만, 그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결여됐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주님을 사랑한 모습은 사도행전 19 19절에 나타납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3년 가까이 복음을 전할 때, 마술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책을 모아서 다 불 질렀는데 그 책 값이 무려 은 5만이었다고 합니다. 은 하나는 1데나리온(Denarius)이며, 당시 하루 품삯입니다. 일당을 적게 잡아 5만 원 치면, 25억 원 상당 재산을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불태운 것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사랑으로 시작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 주님께 책망받았습니다.

 

윤석전 목사:주님께서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2:5)는 무서운 경고를 하셨는데촛대는 무엇이며, 촛대가 옮겨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박영철 교수: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을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일곱 별은 하나님께서 초대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천사들을, 금 촛대는 교회를 비유한다고 합니다. ‘금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교회의 영광을 거둬 다른 곳에 옮기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실제로 에베소와 터키 전역에 있던 많은 교회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남은 모습을 보면서 촛대가 옮겨진 결과가 무엇인지 실감합니다.

 

윤석전 목사:두려운 말씀입니다. 첫사랑을 잃었다고 무섭게 책망을 받은 에베소 교회로 다시 가 보겠습니다.

 

켈수스 도서관은 당시 세계 3대 도서관이며, 장서 12,000여 권을 보유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제자를 양육한 두란노 서원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가 여생을 보낸 집터에 세운 마리아 기념교회는 A.D. 431년 제3차 에베소 공의회가 열린 역사적 장소다. 초대교회 에베소는 주님의 칭찬을 들은 신실한 교회였지만, 화려한 세속  문화에 젖은 탓에 첫사랑을 잃었고 주님께는 촛대를 옮기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훗날 에베소는 전염병이 창궐해 주민에게 버림받았다. 폐허에 남은 십자가 문양은 첫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인의 말로(末路)를 대변한다.

 

윤석전 목사:에베소에서는 교회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에베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를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교수:당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호칭 문제로 불거진 논쟁을 해결하고자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회의 장소가 바로 에베소입니다. 결론적으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異端)으로 판명되고 기독교에서 중요한 교리가 결정된 곳이 에베소입니다.

 

윤석전 목사: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이 문제를 놓고 신학자들은 3개월간 논쟁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이 논쟁을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박영철 교수: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회의로 꼽히는 니케아 종교회의(A.D. 325)와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A.D. 382)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했습니다. 그 후로는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결합해 있느냐?’라는 문제로 논쟁을 심하게 했습니다. 당시 신학자를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dria School)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했기에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할 수 없고, 이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는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반대로 안디옥 학파(School of Antioch)는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했기에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해야 하고,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은인간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폅니다. 두 주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일컬어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중간 입장을 취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쪽에 속한 총대주교 시릴로(Cyrillos)가 대대적인 논박과 반격을 가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파문(破門)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런 결정을 전해 들은 네스토리우스도 상대를 파문했는데, ·서 로마 황제들과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종교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회의가 바로에베소 공의회입니다. 공의회는 시릴로의 주장을 따랐으며, 네스토리우스는 체포돼 이집트로 추방됐다가 거기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윤석전 목사:에베소 공의회 결과가 오늘날 기독교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 주세요.

 

박영철 교수:가장 중요한 점은 마리아가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줘서 가톨릭의성모(聖母) 숭배 사상에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한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로 피신했다가 선교에 마음을 쏟아 인도와 중국에까지 갔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성실한 수도원 생활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았고, 중국에서는경교(景敎)’, 빛나는 종교라는 이름까지 얻었습니다.


윤석전 목사: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과 선교 활동을 알아보고자 경교(景敎)의 역사가 남아 있는 중국 도시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선교 활동이 자세히 밝혀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과 함께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나라에 가기까지 그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진설명>

1. 켈수스 도서관(Celsus Library). 당시 세계 3대 도서관이었으며, 장서 12,000여 권을 보유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제자를 양육한 두란노 서원(hall of Tyrannus)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 에베소 원형극장 앞에 선 윤석전 목사(왼쪽에서 일곱번 째)와 침신대 교수진.

3. 에베소 지도. 

4. 프리타네움(prytanéum). 에베소를 관장하던 시청 건물. 장관·원로의 집회 공관이자 국가유공자들을 위로하고 접대하던 귀빈관 역할을 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6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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