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걱정’ ‘돈이나 그에 수반되는 즐거움에 대한 욕망’. 이 둘은 동전 양면처럼 붙어 다니지만, 세대에 따라 붙들리는 모양은 차이가 난다. 어리고 젊은 세대는 ‘염려·걱정’에 얽매이기보다 ‘부와 욕망’에 쉽게 붙들리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염려에 더 많이 붙들린다. 기성세대가 어린 학생들에게 “이렇게 놀다가는 나중에 거지꼴 된다”라고 겁주어도 잘 안 먹힌다. 차라리 히트 친 어느 참고서 부제처럼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배우자의 외모가 바뀐다’란 말이 훨씬 잘 통한다. 어쨌거나 ‘염려’와 ‘탐욕’, 이 둘은 세대마다 정도만 다를 뿐, 평생 쫓아다닌다.
성경은 인생을 이렇게 정의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히2:15).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는 끝없이 염려를 넣거나, 사치 향락의 욕망으로 유혹해 평생 사망의 세력권에서 못 벗어나게 만든다. 늘 염려에 매여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사망 권세자 마귀가 주인이라는 증거다. 또 그리스도의 사람일지라도 마귀는 끝없이 염려로 결박하려 든다. 마치 잠자다 가위에 눌려 깨어나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보면 마귀는 한 가지 걱정을 슬그머니 넣어주다가 그것에 ‘동의’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구렁이처럼 전신에 기어올라 나중에는 꼼짝달싹 못 하게 온몸을 칭칭 동여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12:22). 여기서 ‘염려하다’는 헬라어로 μεριμν?ω(메림나호)다. 걱정하고 신경 써서 어려움에 부닥치다(to be troubled with cares), 관심 있는 것을 더 추구하다(to seek to promote one’s interest)는 뜻이다. 곧 염려는 ‘공포’와 ‘탐욕’이 혼합된 사망의 ‘칵테일’이다. 주님은 우리가 알기 쉽게 풀어서도 설명하셨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별것 아닌 것도 못 바꾸면서 더 큰 것까지 염려한들 뭐 하겠냐?”(눅12:22~32).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죽이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일밖에 못하는 마귀가 주는 염려를 받아먹고 보이는 현실에 매여 사망의 대열에 서 있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주님은 정리해 주셨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22). 즉 믿음이 더 자라지 못하게 재물과 이익이 가시덩굴처럼 담을 친다는 것이다. 마귀는 재산을 주면서 더 많이 쌓아놓을 탐욕에 빠뜨리고, 아니면 가난하게 만들어 당장 먹고살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목적은 영혼의 때를 위해 살지 못하게 하는 것. 거의 모든 사람이 떼 지어 가고 있는, 두려움과 염려에 종노릇 하는 고난의 인생길. 여기서 벗어나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결혼한 자는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고 세상일을 ‘염려’하나 나는 너희가 염려 없이 살기를 원한다(고전7:34)며 독신을 제안했을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결론은 역시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다.
위 글은 교회신문 <59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