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5]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등록날짜 [ 2017-08-28 13:14:45 ]

영어 문화권에서는 ‘마음’이 심장(heart, 하트)에 있다고 여긴다. 중국어 문화권에서는 슬픔·긍휼·불쌍함·안타까움 등을 느끼는 몸의 기관은 내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장’(斷腸, 슬퍼하여 간장이 끊어짐)이라는 한자어가 생겼다. ‘애’는 창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참으로 죽을 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순간을 당하면 창자가 꼬이는 고통을 실제로 느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瀘)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고 토로했다. 무능한 조정(朝廷), 왜군에게 사정없이 도륙당하는 백성을 바라보는 애끊는 고통이 느껴진다.

‘애끊음’은 어미가 자식을 잃는 슬픔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나라 환온이 삼협을 지날 때였다.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강기슭을 백 리쯤 따라오다가 배에 뛰어들어 그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애끊음’은 그런 것이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憫괜)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민망이라는 단어는 창자, 내장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스플랑크논)에서 파생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이 단어가 기막히게도 우리말의 ‘애를 끊다’라는 뜻 그대로다. 헬라어로는 ‘너무나 불쌍해서 탈장이 일어나게 아프다’라는 뜻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들이 죄로 지옥에 가서 멸망할 것을 미리 보시고 장(腸)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는 시각장애인과 나병환자가 찾아왔을 때도 민망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마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1:41).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의 답답함과 고통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당해 온 멸시 천대에 주님은 장이 뒤틀리는 심한 고통을 느끼시고 그의 눈을 보게 해 주셨다. 나병 환자도 깨끗케 해 주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다고 말씀하시면서 믿으라 하여도 아무도 안 믿고 곡(哭)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11:33).

주님의 우리를 향한 애끊는 심정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당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도 민망하다는 표현을 직접 쓰셨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憫괜)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12:27).

시험받고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만은 할 수만 있다면 벗어나길 원하셨다. 하지만 ‘내가 이를 위해 왔나이다’ 하실 때 애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으리라.

‘민망함’ ‘(스플랑크니조마이)’. 이것은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다. 성령께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감화하면 애끊는 정도는 못 돼도 적어도 애 저릴 정도로는 기도하게 된다. 그게 ‘애절한’ 기도다.


위 글은 교회신문 <54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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