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베드로의 통곡
마가복음 강해(44)

등록날짜 [ 2025-09-16 15:43:21 ]

<사진설명>뮤지컬 ‘내 머릿속의 지우개’ 한 장면. 베드로는 주를 부인한 지난날을 진실하게 회개한 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주를 모른다 초라하게 부인했으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여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하는 삶 살아

기도하고 회개하고 성령 충만해야

목숨 초월해 주를 증거할 수 있어


마가복음 강해(44)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곧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습니다. 본래 산헤드린 공회는 밤에 열리지 않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서둘러 처형하려고 불법적으로 밤에 공회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까지 세워 예수님의 사형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증인들의 증언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침묵하시며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직접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여기에서 ‘찬송받을 자’(막14:61)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를 피하려고 하나님을 ‘찬송받을 자’라고 달리 불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이 대답은 시편 110편과 다니엘 7장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7:13).

그러나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단정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출신의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라며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가장 초라한 부인(否認)
예수님이 공회원들 앞에서 홀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체포 현장에서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수제자 베드로는 멀찍이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는 불을 쬐고 있는 무리에 섞여 예수님의 결말을 지켜보려 했습니다.

그때 한 비자(婢子)가 불가에 앉아 있던 베드로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 여기에서 ‘비자’란 어린 여종(servant-girl)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당황한 나머지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14:68).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힘 있게 장담하던 그가, 한낱 어린 여종 앞에서조차 두려움에 떨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리를 피해 앞뜰로 나아갔을 때 또 다른 여종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당 중 하나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며 더욱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주님과의 관계마저 끊어 내려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마침내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그의 말은 단순한 부인을 넘어 주님을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닭이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장면을 더 자세히 전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제자가 맹세와 저주로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 베드로는 주님의 눈길과 마주쳤습니다. 그 눈빛은 책망이 아니라, 여전히 베드로를 향한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고 깊은 긍휼이 담긴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보다 사랑하던 제자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아픔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의 그 눈길 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고,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구주 예수를 끝까지 증거할 성령 충만
여기에서 베드로의 ‘통곡’은 헬라어로 ‘클라이오(klaio)’인데, 이는 가벼운 울음이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터져 나오는 큰 소리의 울부짖음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의 눈길 앞에서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깊은 절망과 회한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고난과 핍박 앞에서 믿음을 지킬 수도,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 많은 이가 예수님을 단지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 주는 선한 목자 정도로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 살을 받아 먹으라, 내 피를 받아 마시라”며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참된 목자이십니다. 십자가 없는 복을 추구하다가는 결국 신앙이 흔들릴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주님의 이 기도 덕분에 베드로는 진실하게 회개한 후 회복할 수 있었고, 마침내 주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끝내 순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했을 때 지난날 주님을 부인한 제자들 역시 목숨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셨기에 성경이 기록되었고, 오늘날 우리도 그 생명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 죄를 사함받고 영생과 천국을 소유한 자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연약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다시 세우시고, 끝까지 제자로 살도록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오늘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복음의 동역자로 끝까지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강해(44)



위 글은 교회신문 <91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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