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읽는 시편 (5)] 반역자를 위한 피

등록날짜 [ 2026-01-28 11:37:57 ]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하나님을 대적하다 영원히 멸망할

내 사형선고를 완전히 찢어 버렸다.


원수끼리 손잡는 순간이 있다. 공동의 적 앞에서이다. 서기 33년 예루살렘. 총독과 왕과 대제사장이 한자리에 섰다. 평소라면 같은 공기조차 나누지 않을 자들이다. 나사렛 예수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저 자를 없애야 한다. 1000년 전 시편 기자가 이 장면을 미리 써 놨다.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2:2).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다. 죽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하는 멍에처럼 무겁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박처럼 답답하다. 끊어 버리자. 벗어던지자. 그래서 왕을 죽였다. 숨을 주신 분을 그 숨으로 저주했다. 생명을 주신 분을 그 힘으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창조주를 죽인 것이다.


하늘에서 웃음이 터졌다(시2:4). 들끓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하나님이 웃으셨다. 숨결 한 번이면 쓰러질 존재들이 보좌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으니. 그러나 치기 어린 행동이라도 죄가 가벼워지진 않는다. 왕을 시해하려 한 자의 죄목은 사형이다. 반역자의 주소는 지옥이다. 꺼지지 않는 불.


4세기,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언했다. 기독교의 이름은 지구상에서 말살되었다. 땅에서 승리를 외칠 때, 하늘에서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몇 년 뒤,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하나님을 향한 쿠데타는 반드시 실패한다.


여기까지 듣고 안심했다. 저들이 패륜아지, 내가 뭘 어쨌나. 그때 내 기도가 보였다. 내 입술은 왕을 협박하고 있었다. 응답이 늦으면 심문했다. 왜 안 들어주시나요? 뜻대로 안 되면 따져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무릎은 꿇고 있었지만 속은 딴판이었다. 내가 왕이었고, 하나님은 내 결재를 기다리는 신하쯤 됐다. 기도가 아니었다. 갑질이었다.


조건을 걸었다. 기한을 정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침묵으로 버텼다. 기도를 멈췄다. 하나님을 향한 시위였다. 하늘 문을 두드리는 손이 아니라, 보좌를 향해 휘두르는 주먹이었다.


나도 반역자였다. 못과 망치를 들진 않았지만, 왕을 끌어내리려 한 건 나도 같았다. 골고다에 내 지문이 묻어 있다. 지옥 불이 내 주소였다.


반역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반역자의 형틀에 매달렸다. 내가 받을 채찍이 그분의 등을 찢었다. 서른아홉 대. 살점이 뜯겨 나갔다. 내가 뒤집어쓸 조롱이 그분의 머리를 눌렀다. 가시 면류관.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내게 박힐 못이 그분의 손과 발을 관통했다. 뼈와 힘줄 사이로.


철장으로 내 머리를 깨뜨릴 손에 못이 박혔다. 영원한 불에 던져질 내 몸 대신 왕의 몸이 찢겼다. 내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분이 바닥까지 비우셨다. 그 피가 흘렀다. 나무를 타고. 땅을 적시며. 역사를 가르며.


사흘 뒤, 무덤이 비었다. 죽음도 죄 없는 그분을 가둘 수 없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걸어 나오셨다. 하나님이 그분을 왕으로 세우셨다(시2:6). 쿠데타는 기각됐다. 영원히. 하나님 아들의 피. 죄 없는 자의 피. 그 피가 사형선고를 찢어 버렸다.


세상은 여전히 들끓는다. 파도처럼. 불길처럼. 하늘에선 여전히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이, 이제는 무섭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나를 덮었다. 왕의 피 아래 섰다. 그 피 아래서, 우리는 산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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