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성탄하신 예수를 보라

등록날짜 [ 2004-02-18 14:14:29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침례의 의미
본문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요단강에 침례를 받으러 들어오실 때에 침례를 베풀던 요한이 감동이 되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외쳤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을 회개케 하는 침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죄가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나와서 “나는 이렇게 죽어야할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물속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내가 죽을 대신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나를 살릴 것이라는 의미로 다시 물에서 나옵니다. 곧 회개케 하는 침례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침례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침례입니다. 예수께서 물속에 잠기심은 인간들이 죄로 인해 죽어야할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다시 물속에서 나오심은 죄가 없기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는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과 연합하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몸에 이루는 너무나 아름다운 의식인 것입니다(롬6:1-11).

성탄하신 예수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하고 요한이 소리칩니다. 이 말씀과 본문에 나오는 비둘기와 양은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유대민족들이 날마다 범죄할 때에 비둘기를 잡아서 피를 흘려 화제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으며, 일년에 한 번씩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 그 민족이 범죄한 죄를 용서 받았던 것입니다. 곧 비둘기와 양은 우리의 죄를 속하는 증거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으로 죄를 용서할 뿐 죄를 범할 때마다 비둘기나 양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단번에 영원히 죄를 속할 방법은 없을까요? 과연 이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는 말은 곧 우리의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비둘기처럼, 양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나를 살리기 위해 오신 성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속에 나타나신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성탄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이고 불가능한 수많은 문제를 아주 확실하게 해결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육신을 입고 성탄하지 아니하면, 그리고 육신을 입고 와서 자기의 목숨을 우리 인간을 위해 내놓지 아니하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수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육신이 끝난 후에 가야할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며, 예수께서 오신 날을 우리는 성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죄로 멸망할 절망적인 현실에서 탈출할 문이며, 길이며,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러 성탄 하셨는데 그가 이 땅에 성탄하신 목적과 우리가 성탄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다르다면 얼마나 절망적인 일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성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탄절을 오해하여 성탄과는 전혀 상관없는 날로 보냅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와 질병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예수가 오셨다면 우리도 예수께서 주시려는 그것을 받으려고 성탄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날로 보내고 있으니 성탄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해가 가면 갈수록 예수의 성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로 성탄절을 짓밟고 파괴하며 죄악으로 치닫고 있으니 그들의 영육간의 심판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시면서 성탄을 모르고 예수를 몰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식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성탄하신 예수를 아는 사람이며, 그가 주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용서와 갚음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예수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 크신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비난했기에 그냥 죄 없이 용서하겠다고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우리의 죄 값을 모진 매와 저주와 죽음으로 치루시고 다시는 우리의 죄를 물을 수 없도록 해결해 버리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를 용서했다는 말은 다시 그 죄를 물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값을 갚아 주었을 때는 그 죄에 대해서 다시는 물을 수 없습니다. 죄를 해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인데 도무지 갚을 길이 없으니까 주인이 그냥 없는 것으로 하고 용서를 해줍니다. 한 달란트가 오늘 날 우리 돈으로 약 4억 정도 된다고 했을 때 일만 달란트면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를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자 그 사실을 안 주인이 그가 너무나 괘씸하여 다시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으라고 죄를 물었던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백 일의 품값을 말합니다. 오늘 날 하루 품값을 10만원 정도로 했을 때 백일이면 천만원 정도의 돈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이처럼 용서한다는 것은 다시 취소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성탄하셔서 죽으신 것은 용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서 갚아버렸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을지라도 회개하는 순간에 그 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물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갚아주셨으니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가 있다면 회개하여 죄에서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의 이 해방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성탄과 그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천국에 갈 때에 그 길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피로 얼룩진 고난의 길을 연 성탄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절대로 구세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죄와 저주와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죄를 범하면 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치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오늘날도 죄를 범할 때 내 대신 예수께서 죽으셨으니 그의 피를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합니다.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제물이 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는 절규의 기도와 함께, 가야바의 안뜰에서 잔인한 매질을 당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를 갚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에, 그분이 대신 갚아주시려고 맞을 육체를 입으시고 죽을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빌라도의 최후의 법정을 거쳐 갈보리 언덕의 죽음의 장소를 향해, 그 모진 심문과 매 맞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고 탈진하신 육체로 기력이 없어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마지막 죽음의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 아픔 속에서도 알지 못해 멸망하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없이 눈물 흘리시는 주님, 우리가 가야할 길을 대신 걸으시는 그 주님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에 아기 예수를 연상하지 말고, 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고난의 현장을 바라봅시다. 나의 죄 때문에 매 맞고 저주받고 죽기위해 가신 그 피의 현장을 바라봅시다.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자기의 육체를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며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영원한 양식과 음료로 주시는 그 사랑의 현장을 바라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새로운 피조물
예수의 피의 현장으로 인해 우리는 죄와 저주와 고통에서 자유와 의와 거룩함으로 성결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멸망할 자가 멸망하지 않을 자로, 죄의 자식이 의의 자녀로,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예수의 당하신 고난으로 영원히 살아야 할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는 그분께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살 속에는 나를 위해 찢으신 살이 있습니다. 당신의 피 속에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흘리신 피가 있습니다. 그러한 맞으심과 저주 받으심과 당신의 죽으심이 내게 은혜가 되어서 질병과 저주와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성탄을 내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보라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것은 당신과 나를 위한 성탄의 절정입니다. 이 성탄의 절정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성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짓밟으면서 살아왔던 나, 지금이라도 좋사오니 내가 주님의 성탄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주님이 날 사랑하신 십자가의 마지막 죽음을 소유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성탄하신 주님을 환영하오니 이 빚을 지고 죽도록 충성하게 하옵소서. 평생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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