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등록날짜 [ 2019-09-05 15:25:00 ]

베드로전서 1장 18~21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말로만 “구원받은 사람이야”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주님 주신 은혜 꼭 붙들고 전도하고
충성하고 복음 전하고 영혼 관리하라
주님이 주신 피 공로, 목숨보다 크기에
세상 것 때문에 놓쳐선 절대 안 된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아담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죄를 용서해주신 수단이 짐승을 잡아 흘린 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짐승을 잡아 피 흘려 제사 지내도 인류의 죄를 없이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면, 인간은 그 죗값으로 저주 아래 살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그 영원한 멸망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려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멸망에서 건지려 지불한 또 하나의 고통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을까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10:8~9).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자 이를 보는 자마다 독이 퍼져 죽어가는 고통에서 살아났습니다. 죄에 매여 마귀 사단 귀신의 아가리에 들어가 있는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피 흘린 예수를 바라보고 회개하면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들리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
지옥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영원합니다. 그 불구덩이 속에서 타고 또 타고, 타고 또 타고 영원히 죽지 않고 타기만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부자가 음부에서 “아브라함 아버지여, 내가 불꽃 가운데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 손끝에 물 좀 찍어서 내 혀 좀 서늘케 하소서”라고 절규했을까요. 소유를 다 주고라도 해결하고 싶은 것이 고통입니다. 멸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또 하나의 고통이 지불되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하신 그대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 고난이 내가 당할 영육의 고난인데, 예수께서 우리 대신 짊어지고 당하셔서 멸망에서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최고의 화제(話題)로 삼아라
그런데 우리 교인들을 가만히 보면, 구원받은 자 같지 않습니다. 이 엄청난 멸망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육체를 생축 잡듯 잡아가지고 “내 살 받아먹어라, 내 피 받아마셔라, 영원한 양식이요 영원한 음료야!” 하면서 다 주셨는데도, 주님 앞에 하는 행위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에서도 남에게 대접 받으면 더 비싼 것으로 갚아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 앞에는 그런 자존심이 없을까요? 우리가 말로만 “구원받은 사람이야”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최고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나는 그 예수를 알고, 내 안에서 누리게 하셨는데도 별 감동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은혜 입은 자는 그 은혜가 내 안에서 최고의 화제(話題)가 돼야 합니다. 밖에 나가서 말하지 않고는 안 될 화제가 돼야 합니다.


예수 이름을 영접하는 자의 권세
요한복음 1장 12절에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쏟으신 피, 그가 찢은 살이 확실하게 내 심령 안에 있다고 인정한다는데, 왜 이분의 은혜 앞에 감사가 그토록 절실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 절실함을 가지고 아들을 죽였고, 아들은 자기 육신을 쫙쫙 찢어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했고, 또 내 죗값을 짊어지고 대신 죽어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자라면, 은혜 베푸신 주님께 당연히 감사로, 찬양으로, 예배로, 예물로, 말씀에 순종으로 받은 은혜를 나타내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먹었고, 예수의 피를 마셨고, 예수의 살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예수와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피 받은 형제’ ‘한 성령으로 이루어진 형제’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형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지옥 가는 꼴을 쳐다볼 뿐 살려줄 수 없었고, 자식도 부모를 살려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피와 살을 줄 수 있고, 예수의 말씀과 예수 이름을 줄 수 있고, 성령의 거룩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전도하는 권세,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권세, 병 고치는 권세, 귀신 쫓아내는 권세가 지금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기업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인간은 이렇게 은혜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이 세상 노력이나 수고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죄 없는 몸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피 쏟아서 해결했으니, 우리는 너무도 믿어지고 확실하기에 그 사실을 경험으로 갖고 그 주님 앞에 예배 때마다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갑니다. 교회 개척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몸부림치며 신앙생활을 잘해보려 하다가도 어느새 세상 풍속에 장악 당해 믿음의 소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세상 유혹, 돈, 명예에 빠져 교회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누가 이와 같이 다 뺏어갔습니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역사가 뺏어갔습니다. 우리는 예수 모셨으면 내가 영원히 사는 보물창고니 절대 악한 영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피로 이룬 하나님과 인간의 화평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사함을 가져오는 그 피는 바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죄를 지어도 그 피로 회개하면 돼”라며 피를 죄짓는데 이용하면 안 됩니다. 한번 회개하면 두 번 다시 그 죄는 지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피는 죄짓는데 이용하는 피가 아닙니다. 내가 천국 가는 데 사용하는 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사용되는 피입니다. 구세주 예수를 말하는데 사용되는 피입니다. 아들의 피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는 가장 소중하기에 그 피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절대 관심사라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다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평케 되기를 기뻐하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혔는데, 그가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가 이를 믿고 회개하는 순간에 나와 하나님은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그 증거로 말씀이 내 안에 계시고, 그 피와 이름과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니, 모두 그 피로 이루신 것입니다. 돈으로도, 권세로도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는 예수 피가 있어야 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 피만이 절정입니다. 예수 피는 나의 신앙생활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피 흘려 죄를 없이 하시려 오신 예수
누가 예수의 피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죄인이 자격자입니다. 죄를 예수의 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내가 죽어 내 피 네게 줄게. 회개해. 내가 이천 년 전에 죽어서 내 피 네게 주려고 그래. 네 피는 100년도 못살아. 내가 준 이 피는 네 영이 영원히 사는 피야. 생명의 피야. 생명의 피.”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어떻게 네가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어 먹고 마시게 하겠냐? 어떻게 하겠냐?”


수많은 양을 잡아 피 흘리고 소를 잡아 피 흘리고 수양을 잡아 피 흘리면서 성막에서, 성전에서 피의 제사를 진행했던 유대인들. 그들은 제사가 다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향한 제사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체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고, 지금도 율법 아래서 대단히 거룩한 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죄에서 구원하려면 죽어야 하는데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자라는 것입니다. 피 흘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피 흘려서 여러분의 죄를 도말시키고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 구원의 은총, 내가 살 은혜가 그 안에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 피조물을 지으시고 최고로 행복한 에덴동산에서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신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배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배신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에게는 천지 만물을 주었으나 그 큰 은혜를 입고 배신자가 됐습니다. 나와 여러분은 하나님 아들의 살과 피를 주셨으니, 절대 배신자가 되면 안 됩니다.


피로 이루어진 신분 변화
죗값으로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고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사랑할 만한 데가 있어서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성경에 변화산에서 예수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하셨고, 요단강에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기뻐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해서 마귀 자식이 됐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이요!’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들 보내서 죽여서 피로 값 주고 사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말씀으로 거듭나고 진리로 거듭나고 복음으로 거듭나서 어느 모로 봐도 너하고 나하고는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내 아들의 피가 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네 안에 있어, 내 씨가 네 안에 있어, 그래서 너는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됐어’라는 것입니다. 이 신분이 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신분 변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버림받고야 맙니다.


죽어도 못 뺏길 은혜
우리는 교회 와서 주님의 구속의 은총 복음으로 거듭나고 진리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와 같은 기업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그 은혜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 꼭 붙들고 전도하고 충성하고 복음 전하고 영혼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그 은혜를 들고 있는 것은 그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내 목숨 떨어지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눈물 없는 곳, 고통 없는 곳, 다시는 죽음이 없는 곳, 사망이 없는 곳, 거기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예수가 주신 은혜, 그의 생애, 그 피와 살을 꼭 쥐고 가야 합니다. 내 몸은 다 찢어져도 이것만은 못 뺏깁니다. 이 소중한 은혜, 절대로 뺏겨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피 공로는 목숨보다 큰 것이기에, 또 내가 영원히 살아야 할 생명이기에, 목숨이 끝나면 그때부터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 생명의 효력을 가졌다는 증거이기에, 그저 꼭 붙잡고 재산 다 날아가도 이것만은 못 놓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버려도 이것만은 못 놓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욕해도 이것만은 못 놓습니다. 왜냐,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구원의 표로 주셨으니 나는 그 표를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빼앗길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 생명의 피, 생명의 살, 그의 말씀,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 확실하게 있어서 ‘내 것’입니다. 나는 이것 들고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영광을 별것 아닌 줄 알고 세상 것 때문에 놓치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깨뜨리지 말아야 할 하나님과의 조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조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로 주신 조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내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이 속에 예수 피가 있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속에 예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속에 당신이 나의 죄를 도말한 거룩함이 있습니다. 나는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 내 안에 모셨고, 천국도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나라요, 우리 아버지 집입니다. 절대 이것만은 놓을 수 없습니다.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모여서 이 은혜를 가졌기에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더 좋은 것 있으면 또 주세요. 계속 얻기를 원합니다.” 구걸하듯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아들도 주신 하나님이여, 성령도 주신 하나님이여, 아들의 피도 쏟아주신 하나님이여, 그의 살도 찢어주신 하나님이여, 어느 것인들 내게 아끼겠습니까? 그것 주시옵소서. 이것이 자녀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과 나와 분리되어서 마귀라는 ‘디아블로스’ 분리자가 가운데 끼어서 항상 우리를 죄로 지배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서 모든 지배의 권한이 끝났습니다. 우리의 지배자, 안내자는 오직 성령이시기에, 말씀이시기에, 예수시기에 그분이 내 안에 와 계십니다.


가장 위대한 재산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속상해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신 구속의 은총, 성령으로 주신 화목의 증거, 말씀으로 주신 영원히 살게 되는 양식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신령한 축복의 조화를 주셨는데 깨지면 지옥 가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6~29).
율법을 범한 자도 두세 증인을 놓고도 네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거든, 하물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부정하게 여긴다면 얼마나 받을 형벌이 중하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그 피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장 위대하게 내 생애 재산이 되게 해야 합니다.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목숨은 뺏겨도 그 피의 은혜는 뺏길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속죄함으로 죄 사함 얻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4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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