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감사의 과녁 예수의 피

등록날짜 [ 2019-09-10 11:08:51 ]

창세기 4장 1~7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천지간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성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무지한지요. 목숨이 ‘내 것’이라면 자살해도 죄가 안 되겠지요. 하지만 내 목숨은 창조자의 것이기에 내 임의로 죽을 수 없습니다. 자살하면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감히 죽인 살인죄로 반드시 죗값대로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목숨은 불행하게 살다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소유하고 정복하고 사용하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시니 사랑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자기에게 경제적·시간적으로 손해가 되거나  명예에 금이 가는 일에 부닥치면 간사스럽게도 그 사랑이 변하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의 거짓된 사랑과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극명히 대조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한 천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 인간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까지 주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있고 ‘관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이기에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일평생 먹고 입고 사는지 신기합니다.


태양이 6000도라는 어마어마한 표면온도로 지구에 복사에너지를 주어서 인간과 만물을 살게 하는데, 만약 태양에너지가 없으면 만물은 얼어 죽고 에너지가 과하면 절로 말라죽거나 타 죽을 것입니다. 태양에너지로 인한 탄소동화작용으로 각종 나무 열매가 자라 맛을 내고, 인간은 이런 과일이나 채소를 먹고 삽니다. 또 물을 먹고 공기를 마시며 다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데 하나님은 “내 것인데 세금 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인간의 무지
가끔 소갈비를 숯불에 구워 상추에 싸서 입이 터지도록 한번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위장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못 먹으니 그저 그렇게 먹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저 사람 하나님께 참 감사해야겠네, 어쩜 저렇게 이가 좋아 잘 씹어 삼키고 위가 튼튼해서 저렇게 소화를 잘 시키는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잘 먹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또 두 눈으로 만물을 보고 살면서도 건강한 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냥 내 눈으로 보는 줄 아니까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아서 힘든데, 우리는 이렇게 귀가 들려서 서로 말귀 알아듣고 의사소통하면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코가 제대로 뚫려서 공기를 아무리 마셔도 막히지 않고 산소가 폐를 거쳐 머리로 운반돼 피를 통해 온몸으로 전달돼 잘 움직이며 살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못 보는 사람은 잘 보는 이가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못 듣는 사람은 잘 듣는 이가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못 먹는 사람은 잘 먹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운지, 배설 못 하는 사람은 시원하게 배설하는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이처럼 한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못 사는데도 우리 인간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주님 앞에 서는 날, “너는 내 것으로 살면서도 전혀 감사할 줄 몰랐구나” 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만물, 곧 하나님 것으로 내가 쓰고 있다는 이치를 모르고, 나는 하나님으로 산다는 믿음도 없이 살아온 이 모든 무지가 심판의 날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참으로 두렵습니다.


육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전 세계로 부흥회를 다니면서 제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수많은 소경이 앞을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암 병이 치료받고, 에이즈 병이 치료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병 고친 다음에 기뻐하는 모습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기뻐할 수 있나’ 할 정도로 대단한데, 그 기쁨은 고치신 주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에이즈 병에 안 걸렸다고, 암 병에 안 걸렸다고 감사한 적 있습니까? 지금 한국인은 몇 사람 걸러 한 명씩 암에 걸렸다는데, 우리 교인은 거의 암이 없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은혜가 풍성한 곳에 감사가 풍성해야 하는데 왜 감사하지 않을까요. 어디서 은혜가 왔는지, 어디서 내 건강이 왔는지, 내가 어떤 은혜로 살고 있는지, 말로는 “하나님께서”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진실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연희동 시절의 일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오시더니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못 고친다고 한쪽을 인공 눈으로 바꿔 넣어야 한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집사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깟 병든 눈 하나 소생 못 시키겠습니까?” 했더니 집사님이 그날 저녁에 이미 고친 줄로 믿고 병원에서 수술할 비용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무릎을 딱 꿇고 앉더니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응답은 주님이 하실 테니 저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멀쩡해져서 얼마나 감사해했는 줄 모릅니다. 우리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요.


감사할 조건이 우리 속에서 한없이 넘쳐나도 감사는커녕 이 좋은 감사의 조건을 “왜 하나님은 이것도 안 해 줍니까, 저것도 안 해 줍니까?” 하며 하찮은 것들 때문에 원망으로 바꿉니다. 이 답답한 사람들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사이에 무슨 교통(交通)이 되겠습니까.


육신의 고통 없이 살아간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심정을 모릅니다. 중병으로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의 고통을 건강한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너와 고통을 함께하되, 네 고통을 내가 모조리 짊어지고 내가 모진 채찍에 맞았다. 이 사실이 네 것만 되면 네 질병은 떠나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고의로 내게 행복을 부여하시려고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니 상대가 안 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감사하지 않아서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고, 원망해서 하나님을 등진다면, 그 죄를 짊어진 사람이 육신을 마감할 때 그 영혼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나님을 이해하면 ‘아, 내게 이런 축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깨달을 때 그저 감사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기 전에는 무척 건강했는데 신학교에 들어가고부터 몸에 심각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은 소망이 없을 만큼 사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고통의 원인이 죄라면, 지은 죄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주님을 뵐 때 그 참혹한 내 영혼의 때를 어찌할 것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진짜 기도생활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체력이 제대로 회복된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몸은 약해 있고, 지금은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약해 있으나 한 번도 목회에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해 주세요’라고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되니까요. 이것이 제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요, 감사입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우리 성도들의 속을 참 많이 썩였습니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왜 이렇게 짐을 져 주고 사나. 목사 위해서 계속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영적으로 보면 우리 성도들이 목사 위해 기도하게 되고, 금식하게 되고, 결국은 자기 영혼이 성장하게 되고 기도 응답을 받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되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제가 단 한 번이라도 원망의 말을 하는 것 들어 보셨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주를 위해 살고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자나 깨나 걱정하면서 사는데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절대 하지 않습니다. 왜냐? 고통 중에 욥이 하나님을 얼마나 더 깊이 깨달았습니까.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경험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영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그래도 “나는 감사할 게 없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리로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 증거로 죄 없이 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고후1:20~21). 어떤 방법으로 거룩합니까.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받고 회개하고 성령받았으면 그 흘리신 피의 생명이 내 안에서 죄로 죽어 버린 나를 살렸으니, 그 피는 영원히 사는 생명이기에 나도 그 피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불행이 있다고 해도 영생과 천국이 있다면, 주님이 나 위해 죽어 주시고 피 쏟으신 그 은혜는 돈으로 계산 못 할 큰 은혜를 받은 것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인간의 멸망을 바라보고 아들을 보내서 죽이고 찢어서 피 쏟지 않으면 안 되는 은혜요, 말씀을 보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함으로써 내 죄와 피를 바꿔서 지옥 갈 죄는 예수 피 앞에 무너져 버리고 그 피의 생명이 나를 영원히 영생할 자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받고 성령 충만한 때는 세상 만물이 달리 보이고 왠지 모르게 기쁩니다. ‘아니 이런 기쁨이 어디 또 있을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죄 아래서 마귀 손아귀에 끌려 죗값으로 지옥 가서 당할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과 천국을 얻었다는 증거가,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내 안에 임하고 그 아들의 피가 직접 내 안에서 회개할 때 죄를 도말해 내 신분이 지옥 갈 자에서 천국 갈 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내 영혼이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저는 힘들어서요. 어려워서요. 안 돼서요. 저는 돈이 없어서요”라고 할 게 아니라 무조건 순종해서 영광을 돌리라는 겁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그로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바로 내가 구원받고 보증으로 성령받은 자는 언제든지 “예”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은혜는 하나님에게서만 육의 것도, 영적인 것도 오며 예수 그리스도로만 오기에 천하 인간에, 이 땅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오직 구원받을 만한 이름은 구세주 예수밖에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실한 감사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한 마귀 말을 듣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께 도전하고 불순종하는 사단적 행위를 저질렀으니 마귀와 함께 멸망당할 배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는 회개할 기회나 사랑을 전혀 주지 않으시고 흑암의 영원한 결박으로 가둬 뒀다가 큰 날의 심판 때 타는 불 못에 던져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들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범한 죄를 회개만 하면 그 피로 속죄해 주시고 그 피의 생명, 아들의 생명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은 인사치레로 하는 감사를 받기 원치 않으시고, 진실한 감사만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사 받으려고 이 땅에 천지만물을 주셨습니까?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려고 주신 것입니다. 아들 보내서 죽인 것이 인사 받으려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값이 얼마입니까? 여러분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살려서 영생과 천국을 부여하려 했으니 이것은 인사 받는 수준이 아니라 진실한 예배, 정말로 죽도록 충성하라, 마음을 다하라, 목숨을 다하라, 뜻을 다하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라 하신 것입니다. 이 정도로 감사해도 갚을 길 없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내가 몇 번을 주님 위해 죽은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서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갚을 길 있겠습니까. 천지간에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큰 책임감을 갖고 영육 간의 삶 전체를 책임지고, 아들까지 죽게 하면서 사랑하겠나 판단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받았다면서 왜 그분 앞에 진실한 감사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감사
본문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각각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것 중 제일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아 바치고, 아벨은 자기가 기른 양 중에서 흠 없는 새끼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피 흘려 바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려도 예배가 상달되는 사람이 있고 상달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달되지 못하는 사람은 종교의식으로 끝나고 상달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죄라는 담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사야서 50장에도 “네가 손을 들어 나를 잡으려고 애타게 몸부림을 치고 도와 달라고 할 때 내가 손이 짧아서 못 도와주겠냐? 너와 나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서 못 도와주는 것이야. 네가 몸부림치면서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어도 내가 귀가 어두워 못 들어서 도와주지 못하겠냐? 다 듣고 있어. 그런데 내가 도와주려고 해도 너와 나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서 도와줄 수가 없어” 하며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과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해 예수께서 자기 육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시고 피 흘려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쫙 찢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예수 피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와서 예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애타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드디어 상달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죄를 들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가인이 곡식을 쌓아 놓고 제사를 드려도 “죗값은 사망”인데 이 제물에는 생명의 피를 흘릴 사망의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죄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득죄하였기에 ‘죗값은 사망’이기에 정녕 죽어야 할 그 죗값을 양이 대신 피 흘려 죽었으니 이 피를 보시고 제사를 받으시옵소서” 하니 그 피 흘림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죄가 용서되어 아벨의 제사는 상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피가 없으면 그 어떤 예배도 상달되지 않습니다. 피가 없는 예물도 주님이 받지 않으시고, 예수 피가 없는 충성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는 피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피의 은혜 앞에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감사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절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사하는 것은 종교 행위요, 피를 망각한 감사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천 년 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받았으니, 나는 죄에서 자유한 자가 된 그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를 자유케 한 그 피를 들고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갈 때 반드시 이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최고의 예물과 최고의 피 공로의 은혜를 들고 주님을 만나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설교 속에는 회개가 있고, 하나님의 최상의 관심을 끄는 예수 피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아들의 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서운해하시는 것이 피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양을 바치고 피를 흘리듯, 그렇게 예배하는 것이 감사절입니다. 내가 아무리 감사하고 싶어도 그 피의 은혜가 없는 사람에게선 진실한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의 은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령께서 감사에 대한 감동을 주십니다. 곧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 감사를 요구하십니다. 돈에 빠져 마음 뺏기지 말고 예수님의 피 공로에 빠져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받으시는 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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