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피 흘리신 그 사랑

등록날짜 [ 2019-09-26 11:28:11 ]

누가복음 10장 25~37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 다 주신 주님 위해

‘어떡하면 주님 위해 죽을까’는커녕

충성할 때 빠지고, 기도할 때 빠지고

전도할 때 빠지고, 예배시간에 늦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은혜 받은 사이 아닌 탓


책임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거기 계시고, 철저하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책임을 지는 분이십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런 보호와 사랑과 책임을 알지 못해 ‘나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아서 그냥 혼자 같아’ 하며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 책임지셨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책임진다는 전제 아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책임지고 사랑하는 것은, 창조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사는 영적 존재라는 특별한 축복을 부여했는데, 영적 존재인 사람이 영원히 사는 영혼의 주소는 두 군데입니다. 한 군데는 마귀 따라, 죄 따라 가는 지옥이요, 다른 한 군데는 주님 따라 성령의 인도받는 천국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담부터 죄로 말미암아 죽으면 반드시 마귀 따라 지옥에 가서 타는 불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원히 견뎌야 하는, 멸망에 처하게 됐습니다. 인간은 그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목숨 끝나는 순간 지옥에 들어가 죗값으로 영원히 고통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어서 갈 고통의 지옥, 죽게 된 사정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성경 전체의 중심 구절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이라는 형용사 속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다 들어있고 하나님이 오늘까지 나를 사랑하신 내력이 다 들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즉 독생자를 우리가 멸망하지 말라고 주셨으니 하나님의 독생자를 대신 지옥 같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내 죗값을 갚고 나를 고통의 지옥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외삼촌 댁은 항상 먹을 것이 풍족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삼촌께는 자식이 없으니 내가 외삼촌네로 양자(養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우리 아버지는 아들이 일곱이나 되는데도 절대로 외삼촌에게 저를 안 주십니다. 외삼촌이 공부 많이 시키고 훌륭하게 키운다는 데도 안 주는데, 하나님은 내가 죽어야 할 대신 죽이는 일에 독생자를 내주셨으니, 이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어찌 이분 앞에 교만하고 건방지고 이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줬으니까 받았나 보다’라는 정도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줬다면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받았다면 받은 자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 어떠해야 하겠느냐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연희동, 망원동, 노량진 성전을 거쳐 궁동에 오기까지 우리 성도들은 대부분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궁동성전을 지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했을까요? 누가 헌금하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독생자를 나를 대신해서 지옥 같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내 죗값을 갚아 고통의 지옥에서 건져주셨다는 은혜 때문입니다. 진짜 독생자를 부여받아서 멸망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찬양도 감사도 예배도 순종도 독생자의 흘리신 피만큼이나 진실합니다.


제가 철들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사랑의 실상을 만나고 보니, 그 사랑을 생각만 해도 그냥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생각에, 그리고 나를 사랑하셔서 찢어지고 피 흘리며 죽으시는 예수의 모습 앞에 그냥 감사해서 계속 울고 맙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사랑은 어떤 수식어로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일 힘이요, 독생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힘이니 이 사랑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어느 정도 큰지는 인간의 수단을 총동원해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말로 아니라 실천하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병자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죽은 자 살리고 소경 보게 하고 나병 환자 고치고 중풍 병자 걷게 하고, 최후에는 멸망하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십자가로 내주면서까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와 여러분은 이런 이웃을 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내실 때 ‘예수가 아니면 인간은 영육 간에 절망이다’ 하시고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나라에 못간다(요14:6)” 하셨으니,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기업입니다. 예수는 인간을 죄짓게 하고 저주하고 영육 간에 온갖 고통을 가하는 원수 마귀를 멸하러 오셨습니다(요일3:8). 예수가 우리에게 불행을 갖다 주는 마귀역사와 죄를 똑같이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는 이렇게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얼마나 실감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입니까. 여기 자두가 있는데 먹지 않으면 그냥 자두라고 지식으로만 알 뿐, 실제 맛을 느끼거나 비타민을 내 몸에 흡수하는 경험적 사실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실제 경험한 사실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토록’이라는 형용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실감하고 내 속에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습니까?


예전에 산업운동이 일어나던 시대, 온 국민이 저금통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날그날 벌어서 백 원이라도 저금하려고 은행 마감 직전이면 은행에 사람들로 붐비는데, 통장에 돈을 넣고 보기만 해도 흐뭇해서 길바닥에서도 통장을 보고 다닙니다. 통장 속에 있는 돈이 내 것이라는 게 실감나니까, 이 돈이 삶의 믿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가졌다고 하는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 사랑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2)”라고 했으니 얼마나 복입니까. 정죄 받으면 지옥인데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니, 지옥 갈 밑천이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그저 항상 그 은혜에 감사가 치밀어 오르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개척해서 오늘까지 설교하러 처음 강단에 나올 때 설교할 기력이 없어 강대상에 의지하고 겨우 첫 음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설교하다 보면 어느새 몸을 곧게 세우고, 그러다 보면 내 육신의 사정은 잊고 하나님 말씀을 쏟아 붓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말할 때 얼마나 흥분되는지, 듣는 자보다 말하는 자가 훨씬 은혜가 됩니다.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과 영생과 생명이 있으니까 말하고, 내가 말하는 만큼 또 은혜를 받으니 갈수록 힘 있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의 사랑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를 멸해서 죄짓게 하는 이 근원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내 속에 죄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서 죗값은 사망인 근원을 완벽히 끊어버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이 “아버지, 아버지! 이 쓴잔이 내게서 비켜 지나갈 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하소서”라고 할 때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결정한 것은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 후에 군병들이 붙들러 왔을 때 “베드로야, 칼을 칼집에 꽂아라. 내가 이렇게 해야 성경이 응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하신 이 말씀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 가면서 제자들이 각자 다 제 갈 길로 가는 현상이 예언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하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나를 통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죽는 일에 복종하기가 쉽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나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복종해 죽어서 내 죽음을 대신하고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했다면, 평생 ‘어떡하면 우리 주님을 위해 죽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 하신 일과 말씀과 계명은 오직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영생의 명령이었습니다(요12:47~50).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충성할 때 빠지고, 기도할 때 빠지고, 전도할 때 빠집니까. 나는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그분의 일에 절대 결석할 수 없는 투철한 개근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빠져도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은혜 입고 은혜 베푼 관계가 아니기에 그냥 빠지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
본문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습니다. 이 말뜻은 ‘나는 영생 얻을 일을 다 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하나 한번 들어보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말하기를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 하시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예수께서 듣는 순간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십니다. 이렇게 행하면 산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다합니까, 목숨을 다합니까, 힘을 다합니까, 뜻을 다합니까. 마음을 다하면 왜 예배 시간에 늦겠습니까. 만약 예배 시간에 참석하면 한 사람 앞에 천만 원을 주는데 단, 천 명 중에 칠백 명만 주고 삼백 명은 못 준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아마 칠백 명 안에 들려고 새벽부터 오고, 아예 전날 저녁부터 담요 펴고 와서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생이 없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 피의 공로로 “내 살 받아먹어 내 피 받아 마셔 영원한 양식이야 생명이야” 하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옥에서 건진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영생과 천국을 다 주셨습니다. 이분을 만나러 오는 예배에 진짜 구원받고 은혜받았다면 어떻게 늦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가 제게 예배 시간에 늦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예배 시간을 늦으라고 하다니, 그런 큰 욕이 어디 있냐?”라고 할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과 은혜받은 관계 속에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이 예배드리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내 이웃은 누구인가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굽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이웃 된 것을 정말로 축하합니다. 내가 주님과 이웃 됐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쩌다 그런 복을 받았는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과 이웃이 된 이유는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살려줄 사람과 살 사람이 이웃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좋은 이웃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데…” 했습니다. 여리고 길이 얼마나 험하냐 하면, 예수님 시대 그 길은 광야 가운데 낭떠러지가 까마득하고 돌산들이 있는 곳이기에 강도를 만나면 대책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도 만나 다 뺏기고 거반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 죽어가는 꼴을 보고도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사람을 돌보다가 또 강도 만나면 자기도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인은 제사장을 돕고,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를 받아서 먹고사는 성전을 시중드는 사람인데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잘 싸매서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에다 놓고 돌보아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만약 부비가 모자라면 내가 다음에 돌아와서 다 갚아 줄 테니 잘 좀 돌보아 주라” 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은 “제사장, 레위인,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때 “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는 내용입니다.


이웃 사랑은 바로 복음 전도
우리는 전도를 왜 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강도보다 더 큰 마귀 사단 귀신을 만나 지옥 가게 됐으니, 그 영혼은 ‘거반’이 아니라 ‘아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를 살려내는 길은 예수뿐입니다. 주님이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전도를 열망하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열 때마다 사람을 초청해 전도 설교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사 때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려고 몸부림을 치며 애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전도할 이웃이 없는 사람은 제사장 같은 사람, 레위인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과연 영생이 있을까요? 지금 주님 말씀의 결론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토록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나를 살려주신 생명의 이웃, 최고의 이웃입니다. 나도 죄 아래서 멸망하고 지옥 가는 자에게 주님과 똑같은 이웃이 되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랬듯, 베드로가 그랬듯, 초대교인들이 그랬듯, 우리도 그런 이웃이 되자는 말입니다. 영혼을 살려내서 정말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웃, 영생 있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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