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부르짖어 기도하라, 응답하리라

등록날짜 [ 2019-10-08 16:01:43 ]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자원하여 열어 놓으신 기도라는 대문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고 그분만 겨냥해

불가능 해결될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라


예레미야 29장 12~13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영육 간에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앞으로 살아갈 것도, 장래 내 육체가 끝났을 때 영생이라고 하는 생명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도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입니다. 그중 가장 큰 축복은 인간 앞에 놓인 불가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해결받는다는 믿음인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응답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영육 간에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합니다.


인간의 원천적 약점과 불가능
인간은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이 지긋지긋한 사글셋방에서 벗어나 전세방 하나만 얻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세방을 얻으면 자기 집이 갖고 싶고, 그다음엔 더 큰 집을 갖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욕망 때문에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또 인간은 자유하고 싶습니다. 병든 사람은 질병에서 자유하고 싶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서 자유하고 싶고, 죄인은 죄로 얽매인 결박에서 자유하고 싶으나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래 살고 싶어서 보약도 먹고, 각종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그런데 세월이라고 하는 수레는 인간을 싣고 뭘 먹든 뭘 입든 어떤 집에 살든 상관없이 똑같은 속도로 목숨의 종말을 향해 계속 가고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해 보려고, 자유해 보려고, 오래 살아 보려고 별짓을 다 하지만, 사람의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시고, 그분만이 자유하시고, 그분만이 행복하게 하십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원천적 약점과 수많은 불가능을 전지하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보다 먼저 알고 “내가 해결해 줄게. 내게 와서 구해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을 도와주시겠다고 자원하신 기도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부족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어. 건강하고 먹고살 만한데 뭘 그렇게 애타게 교회 가서 기도하겠어?”라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적인 최악의 불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갈라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죄악을 저질렀기에 육체가 끝나는 순간 저 멸망의 지옥에 떨어져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지옥에서 이렇게 고통당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방종하며 살지 말걸’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불가능을 가지고도, 장래의 고통을 가지고도 자신의 상태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의 고통과 장래의 고통이 무엇이며, 당신의 불가능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해라, 내가 응답하겠다. 기도해서 전심(全心)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게 될 거야. 나를 만나는 순간 너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저 지나가다 누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문제를 들고 만나고 하나님은 해결해 주시려고 만나는’ 신과 인간이 주고받는 행복한 만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불가능과 고통을 기도에 담아 가지고 와”라고 명령하신 것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께 우리가 “이 고통만은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며 간청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줄도 모르는 무지한 우리 인간을 아시기에 이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고 자원(自願)한 것이 바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육 간 불가능을 놓고 애타게 구하라는 기도
본문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고통당할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처절한 포로 생활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 처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9:11~14).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절망과 고통에서 해방해 주고 싶어서 애타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가 가진 수많은 불가능한 영육 간의 사건을 놓고 애타게 구하라고 하십니다. 도와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은 애타시는데, 정작 도움받을 우리는 무슨 배짱이나 부리는 것처럼, “기도는 무슨 기도? 주일에 교회 한 번 갔다 오면 다행인 줄 아시오” 한다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귀역사는 이 세상 모든 불가능을 총동원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원망하게 해서 지옥 보내려 합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현실과 상황과 수많은 것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하고 참소하고 내가 숨질 때까지 하나님 관계를 끊어서 지옥 보내려고 몸부림칩니다. 우리 스스로 이를 알지도 못하고 이길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넘실대는 흉악한 죄의 바다 위에서 속수무책으로 살고 있는우리에게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줄 테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도와주시겠다는 절차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하나님이 자녀를 돕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도우시니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라는 절차를 밟아서 올 때만 해결해 주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 달라고 할 때 “주면 좋고 안 주면 말지요” 한다면 어찌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고통의 문제를 청산하려고 아버지 앞에 나올 때는 기어이 얻어내야 하기에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하시게 해서 주시는 분이 멋지게 줄 수 있고, 나는 멋지게 받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내 사정이 아쉬우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불가능이라도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절차는 기도라고 하는 대문(大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겨냥하여 하는 기도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인데도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또 기도한즉 비가 내려 풍성한 생명이 약동했다고 말했습니다(약5:17~18).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아합 왕이 이세벨이라는 이방 여자를 왕비로 맞았는데, 왕도 아내를 따라 바알신을 섬기고 맙니다. 중동지역에서는 최고의 축복이 물이 풍부한 것, 곧 비가 많이 내려 강수량이 풍부한 것인데, 바알이 비를 관장하는 신이라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왕이여, 그 신은 우상입니다. 비를 내리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며 끝까지 저항하니 그런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이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비가 오지 않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습니다. 비가 원래만큼 와도 강수량이 부족해서 살기 힘든 나라인데 수년간 가뭄이 들면 살길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거의 다 죽게 됐을 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당신의 선지자들을 다 데리고 오십시오. 반나절은 그들이 기도하고 반나절은 제가 기도할 테니, 불로 응답해 제물을 불태우는 참신이 누구인지 보십시오”라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갈멜산에 올라갑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85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장작을 갖다 놓고 소를 잡아 얹어 놓고 불로 태워 우리 바알신이 진짜 참신이라는 것을 보여 달라고 애타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자기 조상 열두 지파의 수를 따라 열두 돌을 갖다 놓고, 그 위에 장작을 갖다 놓고 소를 잡아 각을 뜨고 물 열두 동이를 거기다 부어 댑니다. 여름철 뜨거운 열기 속에 장작끼리 부딪쳐서 불이 났다고 억지를 쓸까 봐 도랑이 흥건해서 제물까지 다 적시도록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여, 응답하옵소서”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까지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곳에 모인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 끌고 가서 모두 죽였습니다(왕상18:40).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일곱 번까지 기도하니 비가 쏟아지는데 이스라엘 역사상 제일 많이 쏟아졌을지 모릅니다. 바알이 비가 오게 하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비가 오게 하는 신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능히 응답하시는 하나님만 겨냥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응답하시는 기도
또 고난당하는 자가 있거든 기도하고 병든 자가 있거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 고치고 믿음의 기도는 죄 사함도 얻는다는 것입니다(약5:13~15). 전능자 하나님을 겨냥해서 구하라 주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을 믿어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믿음 없이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역사함이 크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리니” 이게 다 그냥 성경 속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기업(基業)입니다. 이보다 더 큰 넉넉한 창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내가 전능자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응답받을 만한 관계가 돼야 합니다. 제일 좋은 관계는 하늘에 계신 이가 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우주 밖에서 응답이 와야 하기에, 하늘에 계신 이에게서 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최소한 대기권 안에 있는 것으로 응답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기권 안, 우주 안에 있는 것으로는 누군가가 거짓말 한마디 한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온 것도 하늘에 계신 그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 흘려서 내 죄를 사하기 위해서이기에, 기도와 모든 은혜는 우주 안, 즉 인간의 과학문명으로 만든 그 세계 속에서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것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서 다 죽게 됐습니다. 나사로는 평소 주님께 잘했기에 주님이 나사로를 향해 ‘친구’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친구라는 말은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친구는 예수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나를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까요. ‘구하라’는 말은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갔습니다. 무덤 문을 굴리라고 하시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항상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미 나사로 때문에 기도했기에 기도를 들으셨으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말하니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이것은 안 될 것 같은데… 과학으로 안 되면 하나님도 안 돼’ 하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할 믿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초월한 세계 속에서 응답을 얻으려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업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이미 찾을 수 있도록 기도를 시작할 때 나보다 먼저 내 기도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우리 기도가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밤새도록 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믿음의 분량이 기도의 용량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 윤석전 목사도 돈을 초월하고, 명예를 초월하고, 목숨을 초월할 힘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기도에서 옵니다. ‘이 나이에 돈이 있어야, 집이라도 있어야 죽을 때 자식에게 집 한 채라도 주고 갈 수 있지 않겠나?’ 왜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느냐는 말입니다. 없는 이유는 그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고, 내가 가진 소망이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믿음이 제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가 응답하시고 응답받는 자로 열어 놓으라는 말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아서 응답의 문을 닫아 놓습니까? 그 큰 문을 닫아 놓는 까닭이 무엇인지 도무지 납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불가능한 문제를 아시고 “내가 도와주고 일하겠다. 너는 가지고 와라” 하시는데, “당신에게 가지고 간다고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무시한다면 이 사람은 원래 모든 것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안 믿고, 기도도 안 믿고, 아무것도 안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내가 그분을 믿어 드리고, 주님이 내 믿음을 인정할 때 무엇을 가지고 믿든지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는 것인데, ‘특별한 관계’ 없이 믿어지겠습니까. 기도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기업(基業)이요, 자원(資源)이요, 불가능을 해결할 절대 권세(權勢)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 주시겠다고 할 때 “그러면 주세요. 저는 당신이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있고, 신뢰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자기를 믿어 주는 자에게 얼마나 기쁘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기도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피를 흘려서 내 죄를 사하기 위해 목숨도 기꺼이 주셨는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재미로 사십니다. 기도 응답하는 재미로 사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 축복하는 재미로 사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시는 분이 기쁘고, 받는 내가 형통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아쉬움이 해결될 때까지 부르짖으라
저는 교회 개척해서 오늘까지 강건한 육체 컨디션을 가지고 목회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담임목사님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아마 우리 성도들처럼 많이 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 속에 살면서도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면 왜 안 그런 척합니까. 안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강단에 올라가서 성도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여기서 죽어도 말씀을 전해서 성도의 영혼을 살려야 한다’는,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듯’, 자연인 윤석전은 약하나 성도에게 생명의 젖인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 윤석전은 그것을 위해 죽어야 하기 때문에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겠나 생각해 보세요. 이번 베냉성회를 위해서 하는 기도도 그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 제가 예수의 정신, 주님의 피 흘리신 정신으로 저들에게 복음 전해서 40여 국 목회자가 말씀 듣고 큰 변화를 받아 웨슬리처럼, 무디처럼 자기 민족과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게 해 주소서. 이 종을 그렇게 써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모든 것에 더하시리라” 하셨으니 건강은 이 기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새로운 말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놓고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주님의 뜻을 위해 주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 저 말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줄 알지만, 내게 당면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같은 말로 똑같이 기도해도 아버지께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애타게 기도하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해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도 하고, 충성도 합니다. 기도로 성령 충만해서 육신의 정욕과 세상을 이깁니다. 기도해야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 피의 공로에 감사도 넘칩니다.


여러분, 기도의 용량은 성령 충만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시간 기도해서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5시간 기도해도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령이 강퍅하고 완악하면 그렇게 기도해도 성령이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강퍅하고 완악한 것이  빨리 없어지고 10분만 기도해도 성령 충만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빨리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인도 따라 제자들과 같이 살고, 초대 교인과 같이 살고, 영혼의 때가 복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실 하나님이 내 불가능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해결해 주실 분이 아쉬워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해결해 주실 분을 알았으니 내가 아쉬워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아쉬움이 해결될 때까지 부르짖으라고 했으니, 부르짖는 함량이 하나님의 가슴을 채울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응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4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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