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피의 공로 들고 감사하며 천국까지 가라

등록날짜 [ 2019-10-21 17:22:29 ]

고린도전서 10장 1~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계명 무참히 짓밟고 감사 망각한 이스라엘

가나안 땅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하나님 아들의 피의 공로를 망각하고

은혜 배신하는 자 절대로 구원 못 받아

우리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감사가 메마를 때부터 죄는 시작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육신이 있는 동안 태양에너지를 공급하시고, 비를 내려 농사를 짓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복(福)을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이 복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 인간의 육신이 끝나면 영혼이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 하는 엄청난 문제에 직면하는데, 하나님은 그때 지옥 가지 말라고 자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서 ‘하나님 말씀은 영원한 진리(眞理), 불순종은 죄’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영육 간에 망하면 안 된다”라며 하나님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혼의 때 행복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영혼이 복을 받기 위해, 또 복 받은 육신의 때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반드시 복 주신 이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감사치 못하면 원망, 무관심, 짜증, 번민이 뒤따르고 은혜 베푸신 이에 대한 도전이 도(度)를 넘어서 위험한 행동을 하다가, 목숨 끝나면 견딜 수 없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메마를 때부터 죄는 시작합니다.


입으로는 ‘아멘’ 생활로는 ‘아멘’ 안 해
저 자신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감사할 제목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밤낮 몸이 연약해서 힘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고집한다고 뭇사람들에게 핍박받고 욕먹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제 마음속에 소망이 있다면 ‘언제쯤 주님이 오실까? 언제쯤 주님 계신 천국에 가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힘들고 괴로울 때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고생과 고통이 없는 저 영원한 천국을 더욱더 소망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제가 이렇게 사는 복을 받았을까요?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 지옥 갈 죄를 들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십자가 피 공로를 뜨겁게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피 공로로 속죄함받아 죄는 무효 되고 예수 피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되었기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죄를 많이 짓는 것은 자기 본질은 그렇지 않은데도 입으로는 ‘아멘’ 하고 생활로는 ‘아멘’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귀는 지옥에 데려가려고 얼마든지 미혹할 수 있으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와 자기 인생의 종말이 가까운 때는 항상 시험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를 잊으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새 새끼 한 마리 안 쪼갠 불순종의 죗값
본문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과 바다 가운데를 지나야 했을까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실패하자, 하나님께서 “어째서 작은 새는 쪼개지 아니하고 그냥 제사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을 다 쪼개서 피 흘렸으나 새 정도쯤은 작으니까 쪼개서 피 흘리지 않고 그냥 제물로 삼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민족이 이방인에게 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나올 때는 큰 재물을 들고 나오게 될 것이다”(창15:13~14). 새 새끼 한 마리 안 쪼갠 불순종의 죗값으로 400년 넘게 노예살이 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물론 이 사건 속에는 죗값으로 인한 저주만 담긴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에 들여보내 민족으로 성장하게 하고, 결국 가나안을 통치하는 거대한 민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 민족을 수레 삼아 하나님의 아들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일입니다.


자식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낸 어머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우성치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사무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엄청난 노동량을 주고 완수하지 못하면 온갖 학대를 가해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그뿐입니까. 나중에는 아들을 낳으면 산파를 시켜 현장에서 죽여서 이스라엘의 종자(種子)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런 험악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몰래 키우다가 더는 숨길 수 없으니 역청을 바른 갈대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띄웁니다. 나일강에는 바로의 공주들이 나와서 씻기도 하니 공주의 눈에 띄도록 한 의도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그 상자에서 들리는 울음을 듣고 시녀에게 가져오라고 해서 뚜껑을 열어 보니 아기가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준수하게 생겼는지 자기 아들로 삼고 궁전에 데려가서 키우는데, 40년 동안 애굽의 선진 문물을 익혀 뛰어난 인물로 성장시킵니다. 모세의 친모 요게벳이 유모로 발탁돼 아들을 키우면서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야. 너는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계속 주지시켰습니다. 그 말이 모세의 몸과 마음에 젖어듭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어머니께 항상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니까 핍박이 오는 거야. 매도 맞고 욕도 먹는 거야. 때로는 죽을 수도 있어. 사도행전에 보면 신약시대 성도들은 거의 다 순교했잖아. 순교하면 부활이 있고, 부활에 더해 순교자에게 주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상이 있어.”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제게 계속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밤낮 듣는 믿음의 소리가 제 몸과 맘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니 핍박이 오면 자연스레 ‘어머니가 들려주신 하나님 말씀이 내게도 이루어지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이겨나갔습니다. 이같이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돼
어느 날 모세가 애굽인이 자기 민족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애굽 사람을 죽여 암매장했는데 발각이 나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서 이드로의 집 양을 치고,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서 삽니다.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애굽으로 들여보냅니다.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마지막으로 애굽 사람과 짐승의 모든 장자(長子)가 죽어 가는 무서운 저주를 내려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놓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살이를 끝내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은 우리가 죽으면 묻을 무덤이 없더냐? 애굽으로 돌아가자”(출14:11~12)라며 모세를 향해 힐난하며 원망합니다.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들이 더욱 거세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항의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으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하늘나라로 가야 합니다. 이 시대 스마트폰, 인터넷, 육신의 요구가 얼마나 “세상으로 돌아가자”고 우리에게 항의합니까. 끝까지 이기는 자가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도 갚을 길 없는 은혜
앞으로 보니 홍해가 가로막고, 뒤돌아보니 바로의 군사들이 병거 600승(乘)을 끌고 쫓아옵니다. 앞을 봐도 대책이 없고 뒤를 봐도 대책이 없으나 항상 아무도 모르는 대책을 세워 놓는 분이 계시니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며 단 하나뿐인 길을 주셨으니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애굽 군사가 쫓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하늘에서 깜깜한 한밤중 같은 어두움이 애굽 군대 앞길을 가로막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합니다(출14:20). 그때, 모세는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를 바다로 내밉니다.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물을 갈라서 홍해의 바닥을 말려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갈 수 있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다 건널 때쯤, 애굽 군사들을 가로막았던 어두움이 없어지더니 드디어 앞이 훤히 보이는데 저 멀리 바다 끝에 거의 다 건너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입니다. 애굽 군사들이 뒤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바닷물을 양쪽으로 가르던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물이 합쳐지면서 애굽 군사들은 수장(水葬)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은 진퇴양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날 때, 위에는 물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길을 덮고 아래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속에 들어갔으니까 바다에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민족적 침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광야에서 먹고 살고, 반석을 쳐서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만나’는 예수의 살을,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예수의 피를 예표합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물 없이 살 수 없듯, 지금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내 영혼은 예수의 살과 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감사하며 살아도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은 것 아닙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죽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식을 낳아 아들이면 다 죽여 버려 씨를 말리면 이 얼마나 참혹한 일입니까?


감사 않으니 불순종하고, 갖은 못된 짓
그 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원망하고 덤비고 시험하고 간음하고 우상숭배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합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태양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만물을 주어 내가 이 땅에서 살게 하셨다면 당연히 신앙생활 잘하고 예배 잘 드리고 충성 잘하고 전도 잘하고 믿음으로 살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니까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 봐라’ 하면서 얼마나 못된 짓을 합니까? 결국 감사하지 않으니까 불순종하고, 갖은 못된 짓을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10:6). 악을 즐겨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도전하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것을 범하면 죄를 짓는 것이다. 네 영혼이 멸망하니 절대 범하지 마라” 하신 계명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버림받을 자들이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
옛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위해서 경계로 기록했다고 말했으니(고전10:11), 은혜 입은 자가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광야에서 우상숭배 하는 자가 되었기에 멸망당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홍해를 건너게 해서 애굽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깁니까.


우리나라가 고려 시대 470년간 불교 우상숭배를 했고, 조선 시대 500년간 유교사상으로 조상숭배를 했습니다. 천 년간 우상숭배로 젖은 민족인데,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36년 기간에도 천황숭배를 강요하였기에 기독교가 부흥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우상숭배에 찌든 상황 속에 살았으니 얼마나 예수 믿기가 힘들었습니까. ‘예수 믿는 것들은 사람 노릇을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조상에 제사하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들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교회에 가는 것 때문입니다. 도무지 당시 시대와 맞지 않으니 얼마나 핍박이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현재도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상숭배 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되어 있으니, 우상숭배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죽음을 눈앞에 둬도 하지 않는 신앙인이 돼야 합니다. 사정에 따라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하라는 일은 안 하면서 육신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산다면, 육신 끝나고 그 영혼이 하나님을 배신한 죄의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 결과로 가는 지옥은 정말로 끔찍하기에 우리 성도들은 한 사람도 지옥 가지 말기를 원합니다.


간음하고 시험하는 자들도 멸망
그다음 무엇 때문에 그들이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습니까?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이만삼천 명이 죽었나니” 하셨듯이 한날한시에 이만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십계명 중 제7계명이 ‘간음하지 말라’인데 우리나라에도 각종 간음사건과 음란물이 넘치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이 뭐라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멸망할 짓을 한다면 아들의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간음하는 자와 우상숭배 하는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지 말아야 멸망하지 않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은혜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은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뱀이 다 물어 죽여 버렸다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죄악 속에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죄는 크든 작든 멸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없는데?” 합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육신이 끝나면 지옥으로 가서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지금은 괜찮아도 주님 오시면 버림받습니다. 그때부터 절망적인 고통은 영원하니 죄를 남겨 둔 자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무릎을 꿇고 빌며 잘못했다고 했거든 두 번 다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감사를 망각해도 멸망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자.” 어떻게 이 큰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예수 피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또 죄를 짓고 예수 피 공로의 배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 피를 그렇게 더럽히고 예수 피의 공로를 그렇게 싸구려로 만듭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정말로 비싸게 해야 합니다. 원망은 안 했다지만 만약 “하나님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앞으로도 저 스스로 살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또 다른 각도의 원망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강하게 임할 때마다 기도하고 싶고, 충성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습니다. 항상 헌금 봉투에 감사할 내용을 깨알같이 기록해 드리는 재미가 쏠쏠하니 그렇게 하루를 살고 나면 내 마음이 아주 만족합니다. 감사생활은 이런 것인데 감사생활이 메말랐다면 이보다 불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감사하라 하신 이유는 감사를 망각하면 멸망하기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못된 짓을 하기에 “감사를 기억하고 네 영혼이 소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잘하면 하나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2~23).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의 결과는 구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아들의 피의 공로를 망각하고 거저 주신 은혜를 배신하는 자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받은 은혜 잘 계수하여 하나님이 옳다 하시고 흐뭇해하실 만큼 감사해야 합니다.


항상 감사가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시고 메추라기를 먹으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받아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고 한 번도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신명기서는 말하고 있습니다(신8:2~4). 이렇게 그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고, 나머지는 장정만 헤아려도 6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무리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참으로 감사를 잊으면 이만큼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목숨을 다 내놓은들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못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의 피의 공로로 값없이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회개함으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성령의 인도 따라 하나님 나라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갔을 때, 감사를 했어야 감사를 내보일 것 아닙니까. 주님이 내게 흘린 피의 공로, 이 피를 들고 그 앞에 가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의 피만이 천국 문을 여는 열쇠요, 내게 주신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없다면 뭘 가지고 가겠습니까.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주님이 주신 피의 공로를 들고 감사하며 하늘나라까지 갑니다. 최상의 감사로 옳게 행위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음을 확인하게 하시고 은혜받은 자임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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