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등록날짜 [ 2019-11-29 15:31:20 ]

시편 103편 1~6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도 살고,

앞으로도 살고, 영원히 살아야 하기에

하나님께 은혜 입었다는 고백과 증거로

어찌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학벌이나 문벌이 뛰어나지 않은, 그저 성실한 양치기 목동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됐을까요.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행13:22). 하나님과 다윗의 마음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하나님이 서면 자기도 서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면 자기도 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생각과 똑같이 움직인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하는 시를 상당수 썼는데, 103편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첫 구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육체가 아니라 영원히 살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명령합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께 은혜 입어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었으니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송축하지만, 육체라는 옷을 입은 내 영혼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 앞에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내가 얼마나 은혜받은 자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 베푸신 분인지를 찬양으로 화답하며 올려 드릴 때 거기서 나타나는 엄청난 파장은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내 영혼이 찬양할 이유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찬양을 그렇게 마음 써서 해야 합니까?”라고 철없는 말을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내 백성에게 찬송받기’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시편 150편 6절에도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찬양을 괜히 하나요, 우리는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기에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윗이 은혜 입은 하나님께 드린 찬양
두 번째 구절에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라고 하더니 세 번째 구절에서는 찬양의 목적을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하나님의 은혜와 내게 주신 은택을 잊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 사함받은 큰 은혜를 입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받은 은혜라면 그저 한낱 목동이 왕이 돼 하나님 앞에 큰 복 받고 산 것이고, 후대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너무나도 감사해서 자기 영혼을 향해서 애절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너, 하나님 은혜를 잊으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도 살고, 앞으로도 살고, 영원히 살아야 하기에 하나님께 은혜 입었다는 고백과 증거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 것인 공기로 호흡하고, 물을 마시고, 태양 에너지를 누리고, 하나님이 만든 땅을 밟고, 하나님이 만든 만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은택을 입었기에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찬양을 안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은택을 입게 하고 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인격을 형성하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줘서 너를 창조했는데, 그 은혜를 입고도 찬양을 안 하니? 내 백성은 나를 찬양하도록 지었는데 너는 왜 찬양을 안 하니?”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더 큰 엄청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하셨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두 가지, ‘하라’와 ‘하지 마라’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사망과 지옥을 면치 못할 신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라’와 ‘하지 마라’ 입니다. 내가 ‘하라’는 일을 안 했거나 ‘하지 마라’ 한 일을 했다면,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도전한 죄에 걸려 죗값으로 반드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해야 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싹 다 죄로 죽은 자가 태어납니다(시51:5).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태어난 후에 내 임의로 지은 자범죄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마음으로, 생각으로 지은 죄, 행동으로 보고 듣고 말하며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을까요. 이 죗값 탓에 죽으면 지옥에 가서 한 시도 쉴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세세토록 당하게 됩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우리는 죄인이기에 밤낮없이 세세토록 타는 불과 유황 못에서 고통받아야 할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하나님도 아시고 마귀도 알고 있는데, 당사자인 인류 자신만, 나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천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지옥의 참혹한 고통을 못 견뎌. 네가 고통당해야 하는 죗값을 내가 대신 갚아서 너를 지옥에서 건져 줄게” 하시며 말씀이 육신이 돼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누가 죽였나요? 예수는 바로 내가 죽인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면 입술 다 닳도록 찬양해도 부족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영원히 사실 분이요, 우리는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자인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어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상하시고 찔리시고 징계받으시고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의 허물도, 죄악도, 징계도, 질병도, 지옥 갈 모든 죄의 밑천도 무효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 갈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서 내 죗값을 갚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는 죄가 없는데 죽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죄 없는 그가 죽은 것은 우리 죗값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 영원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았다면, 입술이 다 닳도록 찬양해도 부족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 다 드려도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감성과 의지와 지성을 총동원해서 “내가 가진 것은 다 주의 것입니다” 하며 최고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내가 죄와 사망과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구원하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사고를 가진 사람일까요? 악한 사단 마귀 귀신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찬양받으려는 자이니 예수 이름으로 그 악한 자를 몰아내야 합니다. 오직 내게 은혜 베푸신 주님만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성탄절 오직 예수께만 몰두하기를
저는 주일 아침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일예배 드리는 전 세계 수많은 교회 중에서 우리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 주님을 감동하시게 하고 주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게 해 주세요’라고. 예배에는 찬양이 있습니다. 은혜받았으니 주님 앞에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이 마음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여러분도 진실로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예배,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예배, 하나님의 마음을 뺏는 예배를 드리리라 작정하기 바랍니다.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휴일이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여행을 갑니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일 뿐,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에 휴일이라고 어찌 놀러 갑니까? 성탄절에 예배는 간단히 드리고 이곳저곳 놀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화이트크리스마스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피 흘려 나를 구원하신 예수께만 관심을 둬야지 눈이 오냐, 안 오냐 그런 것이 왜 중요합니까. 게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어 보십시오. 성탄절에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나를 건지러 오신 예수께만 관심 두면 되는데 왜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노래를 듣는 겁니까. 성탄절에는 예수께만 몰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위해 죽어 주신 주님께 전 성도가 찬양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탄에 어떤 관심을 두어야 할까요.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32~34).
성령은 예수 피 공로로 죄를 회개해서 의로워진 자에게 임하는데, 예수님은 회개할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물속에 들어갔다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를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온 세상 죄 중에 내 죄도 있으니,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러 예수께서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 ‘내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만이 어린양처럼 너희를 살릴 구세주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나를 죄에서 저주에서 사망에서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주님이 죽으셔야 내가 살고, 안 죽으시면 내가 죽습니다. 주님은 나 위해서 이렇게 죽으러 오셨다는데 어떻게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여행 가방 들고 놀러 갑니까.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러 왔는데 그럴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 죗값으로 지옥 가야 하는데 주님이 왜 나 대신 죽으러 오셨습니까?” 하며 온종일 울어도 부족합니다.


저는 성탄절이 돌아오면 주님 앞에 송구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주님이 ‘내가 너를 위해 죽은 보람 있다’고 느끼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 위해 죽어 구원해 주신 주님께 최고의 감사 표현이 될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것을 위해 죽으러 오신 날 아닙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잔인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보통 매가 아닙니다. 가느다란 가죽 채찍 끝에 뾰족한 쇠붙이를 달았는데, 한 번 후려칠 때마다 채찍이 몸을 휘감고 그 끝의 쇠붙이는 살에 콱콱 박혔다가 살을 찢어놓고 뼈까지 드러나게 합니다. 왜 맞았나요?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는 말씀을 이루어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려고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날 제 길로 갑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사 53:6) 했으나 이날 우리는 절대 제 길로 가는 자가 없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전 성도가 찬양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을 부르면서도 송구합니다. 나는 지옥에서 건짐받아 기쁜데, 주님은 죽으셔야 하니 찬양을 부르면서도 그저 죄송하고 양심에 걸립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 죽으시겠다고 선지자들과 왕들과 제사장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려 육체로 오신 예수의 성탄이 있기에 우리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살을 받아먹어라. 영원한 양식이야. 내 피를 받아 마셔라. 언약의 피, 영원한 생명이야’(마26:26~28) 말씀하시며 자기를 찢어 주어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께 ‘예배합시다, 감사합시다, 예물 드립시다, 찬양합시다’라는 말을 외면할 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이 주님의 은혜에 붙들리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육신의 실리를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미  다 주셨기에 얻은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 내 일이 됨이 마땅
제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릅니다. 5년 남았는지, 10년 남았는지 오늘 저녁이라도 부르실지 모르지만, 정말로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님 위해 바울처럼 미치도록 주님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미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미칠 만큼 사랑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 찬양을 안 합니까. 우리는 성탄절에 눈물로 찬양해야 합니다. 정말로 모든 성도가 눈물로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 신앙의 철이 든 사람은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피 흘리신 정신을 가졌습니다. 철들지 못하면 교회에서 방해꾼이 될 뿐이지만, 철들었다면 주님 일이 잘못될까 봐 늘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항상 주의 일을 내 일처럼 하지 남의 일처럼 하지 않습니다. 나를 피로 사서 구원하신 주님 앞에 어찌 남처럼 살겠습니까. 주님 오시면 주님의 신부가 돼 들림받아 주님을 만날 텐데 어찌 남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이니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자기 일같이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다면 나도 주님 일이 내 일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새 생명 주셨으니 찬양·송축·감사해야
왜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분이 베푸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까. 첫째, 내 모든 죄악을 사해 주셨고, 내 모든 병을 고쳐 주셨고, 내 생명을 파멸과 지옥에서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고, 영생과 천국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되(시103:5), 죽었던 자에게 다시 사는 새 생명을 주셨으니 마땅히 찬양하고, 마땅히 송축하고,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 내게 복을 주세요. 물질의 복을 주세요. 세상에서 출세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를 아는 사람은 예수께서 이미 다 주셨기에 평생 감사하며 삽니다. 신앙생활은 육신의 실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이미 얻은 것에 감사하려고 합니다. 천지만물을 얻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도 얻었습니다. 어쩌다 내가 예수 믿고 천국 가게 되었는지, 참으로 감사할 만하고 찬양할 만하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확인합시다
어찌 눈물 없이 예수 믿나요? 어찌 찬양 없이 예수 믿나요? 어찌 감사 없이 예수 믿나요? 우리 너무 주님께 모질게 하지 맙시다. 주님은 내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행하신 분량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량입니다.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그리 잘났다고 주님 원하는 일에 “나는 못 하겠소!” 하며 거역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마귀 역사니 절대 당하면 안 됩니다.


죄악이 점점 관영(貫盈)해 갑니다. 마귀 역사가 세상을 이용해 미혹합니다. 육신의 요구는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계속 내 영혼을 사냥하려 몸부림칩니다. 이것들에게 당하지 않는 비결은 십자가 피의 공로가 이 모든 것보다 커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기라 하셨습니다(요16:33).


사랑하는 성도여,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사랑하기가 벅찹니다. 내가 겨우 반딧불 같은 사랑을 주님께 드린들 무슨 표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마음을 받으시기에 정말로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까지 드리고 예수님이 내게 목숨 주셔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확인합시다. 고백합시다.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5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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