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세상을 이기는 믿음

등록날짜 [ 2020-02-18 20:53:32 ]

요한일서 5장 1~8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살려면 이겨야 하고,
지면 이미 죄를 짓는 것이요,
죗값은 사망이니 세상을 이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세상을 지배할지언정
세상의 다스림을 받아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다
본문은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신앙생활의 방해 요소를 어떻게 알아서 이기느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을 이기는 생활이기에, 도대체 무엇을 이겨야 할지조차 모른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무엇이 내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가, 방해하는 그 요소를 내가 이기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세상에 휩쓸려 한낱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육신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라는 악한 세계를 지배하던 영이 “너는 세상에 속해 나와 한 패거리로 살았으니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라고 끌고 갈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말은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 죽으셔서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내가 죄 사함받고 거듭난 체험이 있기에 죽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영적 유전자’가 하나님과 같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선하심, 의로우심, 신령하심, 사랑하심이라는 특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창1:26)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아담부터 마귀에게 속아 죄를 범하고 마귀에게 속해 마귀 자식이 돼서 마귀를 닮았느냐는 말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면, 마귀를 멸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하나님을 닮지 못했다면, 자기 혼자 ‘하나님이 나를 낳았다’고 우겨댈 뿐, 실상은 아님이 분명하기에 그의 삶에서 증거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나를 낳았다는 믿음은 동격(同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지라도 세상이 주는 것들로 잘 먹고 잘 살고 육신의 안위에 푹 빠져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그는 거짓말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는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하여 창기(娼妓)와 함께 다 써 버립니다. 돈이 있을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지만, 돈이 떨어지니 모두 외면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당신의 시간을 뜯어먹고, 육신의 때를 뜯어먹을 뿐, 영혼의 때를 위한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에 자기 인생을 다 뜯겨 남은 것은 죄뿐이고 갈 곳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이제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면서 돼지 먹이인 쥐엄열매로 겨우 주린 배를 채웁니다. 그나마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이러다 내가 주려 죽겠구나. 부끄럽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라고 결심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 집에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의 피 공로로 속죄받아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청년들을 자식보다 더 사랑했지만, 그들은 아무도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낳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이 피 쏟아 죽으셨으니 우리는 이를 믿고 회개해 죄 사함받아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될 때부터 거듭난 것입니다. 이 생명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으니, 예수가 주신 생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해 주셨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하나님께로 거듭난 자들은 거듭난 자들끼리 사랑하게 돼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에도 ‘우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한 아버지를 모신 자녀입니다. 그래서 주신 계명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13:34)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줘서 그 목숨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니,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그 생명 가지고 예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됐으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감 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랑은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면서 서로 교통하는 것인데,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실감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사랑해 주세요. 하지만 나는 사랑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만 받으려 듭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성장이 없고 밤낮 제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육체도, 가정도, 만물도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 예수를 아낌없이 줘서 그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하셨는데, 우리는 그분에 대한 태도가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은 계명 중에 제1계명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 계명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되 주님이 너를 위해 목숨을 주심과 같이 이웃에게 목숨을 줘서라도 그 영혼 구원해야 하는 것이 둘째 계명입니다(막12:30~31).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나는 너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시면, 내 영혼이 최후에 당할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어찌해서 주님만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아버지를 떠난 탕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2). ‘계명’은 곧 ‘사랑’이라는 말인데,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남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사랑은 악착같이 받으려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죽으신 이유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죽어야 하는 이유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에서 나온 생기를 사람의 코에 불어넣어 사는 영, 곧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창2:7).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실과를 먹었기에 정녕 그 영은 죽고 육체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 피 흘려 죽게 하시고, 그 피의 생명을 내게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하나님의 인격체인 나를 창조하셨고, 둘째, 아들을 보내서 아들의 생명을 내게 줘서 나를 살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도무지 우리에게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는 능히 이 관계를 끊어 놓으니,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계명을 지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길 뿐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죗값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쌓이고, 내 영혼은 죽어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계명을 주신 것은 ‘너와 나의 사랑의 관계를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은 ‘이 생명을 절대로 유산(遺産)해서는 안 된다. 이 생명 갖고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피 쏟아 자기를 팍 찢어 피를 내 안에 주시고, 그 살을 양식으로 먹게 해서 영원히 살게 했다면, 주님의 이 은혜를 입었다는 증거로 내 육신의 삶은 주를 위해 살고, 반드시 주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받은 자의 고백이요, 사랑을 끝까지 가진 자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성경 전체 계명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 그런데 구약 율법은 거의 다 “하지 말라”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는 소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행동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하셨습니다. 구약은 ‘하지만 않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신약의 법은 행동해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명이 ‘사랑’인데 사랑의 최고 절정은 예수 몰라 지옥 가는 사람에게 예수를 알게 하고, 그 영혼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자기만 사랑하면 되지만, 신약에서는 자기 사랑과 동시에 사랑받은 만큼 이웃에게 사랑을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계명을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까. 그저 가만히만 있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힘들다, 계명이 무겁다”라고 불평합니다. 본문에 주님은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계명을 범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지옥 가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계명을 지킵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은 증거가 내 안에 있기에, 그 사랑의 생명이 있기에 그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밥 먹는 것이 힘든 사람 있습니까? 내가 살려는 일인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내 앞에 놓인 길이 끊어졌는데, “그 길로 가지 마라. 끊어진 길로 가면 죽는다”라고 일러줄 때, 멀리 쳐다보고 스스로 살려고 다른 길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살려고 하듯, 계명은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기에 살려고 스스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무겁지 않고 아주 가볍습니다. 사는 방법을 일러 줬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니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면 나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켜야지, 왜 말씀대로 살기 힘들고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고 불평합니까. 아직도 거듭난 자기 영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게 “오늘은 몸이 피곤해서 기진맥진하니 설교는 부사역자에게 하게 해야지. 내일부터 직분자세미나를 해야 하니까 몸을 아껴야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사랑인 줄 아십니까? 진짜 사랑은 이 육신을 성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데 쓰는 것입니다. 계명이 무엇인지 알면, 살려고 지킵니다.


마귀는 ‘죄짓기는 쉬운데, 계명을 지키기는 어렵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이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미워할 짓 하는 사람을 보면 세상은 당연히 미워하지만,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해. 저 미워할 짓이 죄야. 저 짓 하다가 죽으면 지옥 가니 저 영혼이 불쌍하잖아.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사랑해”(마5:44)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모든 생각과 계명에 반대하는 원수를 이기라는 말입니다.


제가 집사 시절에 주일에는 물건을 안 사고, 예배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고, 제사 음식 안 만들고 안 먹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율법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윤 집사,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주일이라고 물건을 안 사나? 필요하면 주일이라도 사야 하잖아.”


“성경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니, 어찌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다 살아? 사람이 융통성 있게 살라고.”


융통성을 틈타고 들어오는 자가 마귀 역사이니 융통성이라는 틈을 주지 않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율법 안 지켜도 된다고 했습니까? 성경에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아느냐 완전케 하러 왔다. 천지는 없어져도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고야 말리라”(마17~18) 하시며 율법의 완성에 관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보완해서 죄를 더 강화했습니다(마5:21~22;27~28). 율법을 강화한 하나님의 법이 내 속에서 죄는 씨앗도 나타나지 않도록 아주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범한 죄까지 다 짊어지시고 예수께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회개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사랑받았기에 주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기에 내게 계명을 주셨고, 계명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받은 것이니, 그 사랑에 감사해서 충성하고 죽기까지 주께 나를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예수께서는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찔려 내 허물을 해결하시고, 상해서 내 죄악을 해결하시고, 징계받아서 내 징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으셔서 내 저주를 담당하시고, 피 쏟아 죽어서 내 죗값을 갚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이 어마어마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자기를 찢지 않으면 안 되고, 상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징계받지 않으면 안 되고, 저주받지 않으면 안 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을 사랑한 자들이 계명을 지킨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 세상을 이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왜 세상은 이겨야 할 대상입니까? 세상의 방법은 전부 다 육신에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이 편리하면 편리할수록, 육신의 요구대로 살수록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요, 굴복할 수도 없도록 만드는 것이 세상입니다(롬8:6~7).


세상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 이깁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법대로 삽니다. 세상 법대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이 지배하는 자는 세상과 더불어 멸망하지만, 아들을 보내 거듭난 사람, 곧 그 생명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늘의 계명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그런데 제 힘으로 세상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고 계명을 지키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상대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그 사람이 밉지 않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기도해 줍니다. 성령 충만하면 정욕, 시기·질투, 미움·다툼, 불평불만이 사라집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성령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살려면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지면 이미 죄지은 것이요, 죗값은 사망입니다(롬6:23). 우리는 세상을 지배할지언정 세상의 다스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 세상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런 모든 세상을 이길 힘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는데, 계명 안에는 세상을 지키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축복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며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게 될 것이다”(창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물질적으로는 매우 황폐한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쪽으로 갈수록 육체는 힘들고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물 한 방울 없는 척박한 곳이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척박한 땅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그곳에 아들 예수를 보내 인류가 먹고 마실 살과 피를 넉넉하게 나타나게 하시니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복 말고 하늘에서 누리는 복, 곧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법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도 세상과 상당히 관계 있으니, 그것을 털어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다르다고 핍박받고 욕을 먹겠지요. 그래서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고 했으니, 천국을 얻기 위해서 세상과 달리 살아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 영혼을, 내 생명을, 내 영생을, 내 구원을 지키는 길이요, 구원을 지키면 천국을 지키는 것이니, 못 지켜서 무너지면 나는 결국 죄로 지옥 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로 난 자 되어 세상 법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6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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