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네 영혼의 부유를 위하여

등록날짜 [ 2020-04-04 10:36:04 ]

누가복음 12장 13~21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죽으면‘돌아갔다, 세상 떴다’라고 표현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생명 갖는 것.

예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행복을 주려고
참혹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그가 마신 쓴잔은 우리에게 영원히 마실
생명이고, 구원이고,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진짜 나는 영적 존재인 생령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창2:7).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육신이라는 한 줌의 흙덩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령(生靈), 곧 우리의 영혼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육체에 머물러 있는 고작 70~80년간 살다가 영혼이 떠나면, 육신이라는 흙덩어리만 남았다가 결국 그마저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본문 말씀은, 부자가 많은 물건을 창고에 쌓아놓고 “내 영혼아,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할 때, 하나님이 그날 밤 그 영혼을 불러 가시면 창고에 쌓은 그 모든 재물이 육신 것도 아니요, 영혼 것도 아니니 얼마나 무상하냐는 말입니다. 육신은 갖지도 못할 것에 욕심을 부립니다. 권력, 지식, 돈 모든 것을 누리며 살지라도 인간은 세월 앞에 사라져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이 있는 동안 모든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 그토록 육신이 수고해서 얻은 것이 영혼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생명을 줄 수 없고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게 바로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네 영혼이 부유를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부르시는 순간, 그것으로 그 육신의 때는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삽니다.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지 말라, 공부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지식도 모두 영혼의 때를 위해 사용하고, 육신의 때를 내 영혼의 부유를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이요, 무형상이요, 존재요, 인격입니다. 영혼은 제한된 세월을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세월에 제한받지 않는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육신의 세월을 산 사람이 므두셀라인데 969세를 살았습니다(창5:27). 하지만 므두셀라의 육체도 세월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매일 세월 속에 사라져 가고 있고, 영혼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때가 끝나는 날, 내 영혼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심판받아 그 결과가 영혼의 때에 영원히 전개됩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똑같이 심판의 그날은 다가옵니다. 진짜 ‘나’는 바로 내 영혼입니다. 육신의 목숨은 지금 내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 떠나는 순간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갔다, 세상 떴다’라고 합니다. 세상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할 것이 예수가 주는 생명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내놓은 그의 생명,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영생과 천국이 있어야 우리가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려고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이룬 것이 영혼의 몫이 아니라면 한 번뿐인 육신의 때가 끝나는 순간,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투자해 건질 것이 없이 죗값으로 지옥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하는 처지라면, 이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왜 예배합니까? 내 영혼의 때를 위하여 주님이 내게 생명 주셨기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내 안에서 아무도 뺏어 갈 수 없기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도 그 생명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본문에,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그 소유로 사람의 생명은 살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왜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까? 최초의 인간 ‘아담’은 히브리어로 ‘영적 존재’, 다시 말해서 생명을 가진 영원히 사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려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일러줬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마귀 궤계에 속아서 선악과를 먹는 순간 정녕 죽음이 왔으니 거기서 영적 생명이 끝났고, 사는 것은 육체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끝난 다음, 아담에게서 태어난 자는 전부 다 생명이 끝난 자들뿐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생명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목숨이 끊어졌다’ ‘죽었다’라고 하면 흙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에서도 법을 어기면 죗값을 교도소에서 치러야 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의 대가로 지옥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교도소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으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저주받고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대신함이요, 예수께서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함이요, 예수께서 징계를 받음은 우리의 징계를 대신함이요, 예수께서 저주받으심은 우리의 죄로 오는 저주를 대신함이요,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은 우리 질병을 담당하심이니, 예수께서 피 흘려 죽으심은 지옥 갈 사망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심이니 예수가 아니면 새 생명을 줄 자가 없습니다(사53:5~6).

아들을 죽여 진실과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생명을 얻지 못하면 죗값으로 반드시 지옥에 가니, 여기서 살아나는 방법은 “내가 길이고 진리야. 진리 속에는 반드시 너를 살리는 생명이 있어. 내 생명을 가져야 아버지께로 간다”라고 하시는 예수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를 애절하게 설득하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사랑의 목소리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진실하게 듣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끼니마다 아버지와 한 밥상에서 식사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밥을 먹는지, 벌을 받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늘 인간답게 사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시는데, 자식을 바르게 키우고 싶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모르니까 그저 간섭 같고 잔소리 같아 괴롭기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피 흘려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속사정을 안다면, 죄와 사망과 지옥의 문을 닫고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그 축복의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고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 대신 죽게 하신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죽으면 ‘죗값은 사망’이기에 지옥에 가니까, 그 죄를 아들에게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해서 사망인 죗값을 갚아주고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한 자는 죄 사함 받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애절하고 진실한 사랑입니다. 아들을 대신 죽여 우리를 살린 그 사랑보다 더 큰 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랑을 가지라고 말하는데도 그 사랑으로 죄 사함 받고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라고 애타게 말하는데도, 우리는 그저 듣기만 할 뿐 내 몫으로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만큼, 그 피가 심장에서 펑펑 터져 나올 만큼 우리에게 진실한데도 우리는 그 진실한 사정을 모르고 그저 하나의 이야기처럼 듣고 있다면, 당신 영혼의 사정이 정말로 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가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의 소유는 네 육신이 있을 때 잠깐 있다 끝나지만, 내가 주려는 생명은 영원한 것이니 이것을 가져야 영원히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생명으로 사는 영생과 천국을 우선하기보다 육신의 것, 자기 권리인 아버지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이렇게 애타게 가르쳐주신 신령하고 절대 전지한 지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들을 때는 “맞아요” 하며 동의하는 듯해도 돌아서면 주님의 정신과 상관없이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삽니다. 자신이 항구적인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요, 알더라도 사실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막연한 얘기야, 그건 뭐 죽은 다음에 일어날 얘긴데,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육신이 급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밤낮 육신의 문제가 급하다고 하다가 목숨이 끊어지면, 주가 주시는 생명을 얻어 영혼의 때에 지옥 신세를 면하고 천국에서 살 기회를 만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 욕심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富者)도 육신의 때의 부귀영화를 최상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끝난 다음 부자의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버려질 때, 지금까지 누리던 부귀영화와 수많은 육신의 욕구 충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육신이라는 집에서 영혼이 떠날 때, 이제 진짜 자기 본질인 영혼이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맞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꿈을 꿀 때, 나는 분명히 자고 있는데, 또 하나의 실재인 나라는 존재가 현실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떠나는 순간에 육신은 아무런 가치 없는, 썩어가는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부자(富者)가 육신의 때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았지만 육신이 끝난 순간, 불타는 지옥에서 쉼 없는 고통이 시작될 때 견딜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 2,000년 지났지만, 지금도 그 부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이 부자는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요. ‘내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고, 율법 아래 살던 선민이었는데, 내 영혼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육신만 사랑하다가 죗값으로 지옥에서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며 얼마나 이를 갈며 후회할까요.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말합니다. “아브라함 아버지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세상에서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물을 저 불타는 지옥에서는 한 방울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주신 생명을 거부한 자들이 영혼의 때에 지옥을 선물로 받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는 말입니다.


지옥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하고 처참한 고통을 쉼 없이 세세토록 받게 됩니다. 이것이 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돈 있으면 살고, 권력 있으면 살고, 명예 있으면 살고, 지식 있으면 산다”라고 해서 일평생을 속이는 마귀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을 결박해 세상 것으로 욕심부리며 살다가 그 욕심의 죗값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 지옥에 내던지는 무서운 존재이니 그 마귀 역사에 절대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제사장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위해 살지 않고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 욕심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정의하셨으니 우리 모두 육신의 때에 영혼의 때를 위해 살기 바랍니다.

영적 생활로 천국 갈 믿음 가져야
부잣집 문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는 육신으로는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 살면서 가난과 질병에 휩싸여 살았으나 희망 없는 육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육신을 위해 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에 결박당하고 질병에 결박당해서 심지어 개가 그의 헌데를 핥던 비참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자로 살든 거지로 살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육신의 때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끝이 납니다. 가난하고 병든 육신 역시 세월 속에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날, 영혼은 가난도 질병도 없는 저 천국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히 행복한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십니까? 육체가 병들었습니까? 살기 힘드십니까? 참으로 나사로 같이 비참합니까? 다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끝날 때 육신 때문에 나타나는 모든 고통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사로처럼 영적인 생명을 가졌다면, 예수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 받아 생명을 가졌다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옥문은 닫히고, 하늘 문은 열립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주신 은혜요, 항구적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누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세상에서 출세한다고 하던가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속아서는 안 되고, 속여서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곧 찬란한 영혼의 때 영생과 천국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세월은 그날을 우리에게 데려다주는 수레와 같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게는 지옥으로 데려다주는 수레지만, 예수 피로 죄 사함 받고 사망을 해결한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행복의 날로 하루하루 데려다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행복을 영원히 주시려고 그토록 참혹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신 쓴 잔은 우리가 영원히 마실 생명이고, 구원이고,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육신의 때는 가난하든 병들든 젊든 늙든 영혼의 때를 위해 살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회개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과 생명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요구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요구는 예수의 생명이요 속죄요 그의 피의 은총이요 영생이요 천국이어야 합니다. “네 모든 소득을 가져다 창고에 쌓아두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주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지식에 동의합시다. 우리 모두 육신이 있는 동안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자기 영혼의 부유를 위해 영적 생활을 우선해서 천국 갈 확실한 믿음을 가집시다. 세상과 육신의 때를 위해 살다가 부자와 같이 영적인 실패자가 돼 지옥의 영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쓴 잔이 여러분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 생활의 실패자보다 더 참혹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때를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해 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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