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등록날짜 [ 2020-05-02 10:45:44 ]

요한복음 6장 32~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다른 수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먹는 양식은 인간의 

육체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에 불과하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가 주신 생명의 떡으로 영혼이 살고 

주가 주신 생명의 피로 죗값인 사망을 

파괴하고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가 없다면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에 가야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 계실 때, 예수를 만나러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여듭니다. 각색 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고통당하는 자는 해결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소문이 대단한가’ 하며 호기심 때문에 모여듭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예수를 만나러 모인 사람이 장정(壯丁)만 헤아려도 오천 명이 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노인과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2만5천에서 3만 명은 됐을 것입니다. 광야(廣野)라고 하는 곳은 태양의 강한 열기 때문에 45~46도를 넘고 땀이 흐르기도 전에 땀샘에서 말라 버릴 정도로 더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온종일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천국 복음을 듣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다가는 허기져서 쓰러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요6: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 빌립이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6:7)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을 익히 아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어떤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도시락을 예수께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祝辭)하시고 차례차례 떼어서 나누어 주시니, 거기 모인 장정 오천 명과 남녀노소가 다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차게 남았습니다. 예수는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남은 떡을 가지고 가서, “예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 이렇게 남아서 가지고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가난한 자에게 양식이나 주러 온 분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광야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도 이스라엘 광야에 가 보았는데,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이 펼쳐져 있고, 태양 빛이 이글거리고, 회오리바람이 한 번 불면 바람에 흙먼지가 몰려와 어느새 흙산이 하나 생길 정도이니 어디든 생명의 위협이 도사립니다. 이처럼 물 한 모금 얻을 곳 없고, 양식 한 톨 구할 데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지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 육신은 이 땅의 열매를 양식 삼아 먹고 살지만, 우리 영혼은 이미 죄 아래서 양식도, 음료도, 의복도, 거처도 전혀 없는 광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영적인 광야인 줄 아는 이가 “살려 주세요”라고 몸부림칠 때, 주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없다면 내 영혼은 삭막한 광야에서, 죽어서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에 가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은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

예수께서 떡을 나누어 주신 후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떡을 주시려나 매우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 사람이 제 살을 줘서 우리가 먹게 하겠는가?’ 하며 실망한 채 예수를 떠나갑니다. 예수의 말은 현실적, 상황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준 떡은 육신이 먹고 살라고 준 양식이지만, 예수의 살과 피는 영혼을 위한 영원한 떡과 음료라는 말입니다(요6:55). 그렇게 먼저 광야에서 떡을 만들어 주고, 다음에 영적인 떡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못 알아듣고 다 떠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6:67)고 물으십니다. 그때 제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답합니다. 광야에서 먹은 떡은 한 끼 먹고 나면 그만이지만, 내 영혼이 사는 영생의 말씀은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이기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길게 육신의 세월을 산 사람이 므두셀라인데, 969세를 향수했습니다(창5:27). 성경에도 “우리의 년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90:10)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100년 미만 살다 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 육신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이렇게 살다 가는 육체에 희망이 없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영혼의 존재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내 영혼이 영원토록 사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감이 잘 안 나니까 신앙생활에 마음을 쏟지 않는 것입니다. 말로는 “영혼의 때에 영원히 산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실상을 보면 육신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육신은 마치 거품처럼 있는 듯하나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뿌리가 뽑혔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머지않아 죽을 나무처럼 사라져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코에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었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영원성(永遠性)을 가진, 영원토록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풍성한지 아는 자라면, 그 생명을 얻어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살려는 열망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생명 없어 죽어 버린 존재인 인류에게 제한 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곧 살리는 영으로, 생명의 근원으로 주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살리는 영으로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영육 간에 풍성히 누리며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셨으나 첫 사람 아담이 마귀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고 생명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죗값으로 사망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세세토록 지옥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어 죽어 버린 인간은, 하나님이 다시 주시는 생명이 없으면 절대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것에는 스스로 생명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는, 절대 광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살리는 영으로, 생명의 근원으로 말씀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살기 원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 되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시는 그 생명을 열망합니다.


죄는 생명을 죽이는 원수요, 죄짓게 하는 존재는 마귀역사니, 죄와 마귀역사를 바로 알고 이 원수에게 내 생명을 소멸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마귀의 궤계를 좇아 선악과를 먹어 죽음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창조될 때 ‘사는 영’, 곧 ‘생령(生靈)’으로 지음받았는데, ‘사는 영’은 생령을 상실하면 다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살리는 영’이라 했으니, ‘살리는 영’이 와야 ‘사는 영’이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피 쏟아 나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살리는 영’이기에 오늘도 내가 죄를 범해서 내 영이 반드시 죽을지라도 예수 피의 공로 앞에 회개하면 다시 살아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한, 광야는 내게서 사라졌고 예수로 말미암아 푸른 초장이 나타나고, 물 댄 동산이 나타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만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육신을 우선하도록 우리를 속여서 욕심부리게 하고, 거짓되게 하고, 육신 때문에 자기 영혼을 위해 살 기회를 다 잃게 합니다. 결국 목숨이 끝나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 ‘살리는 영’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다시 사는 생명이 없으므로 바로 ‘죗값은 사망’이기에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살아나야 기도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감사하고 싶고, 예배드리고 싶고, 성령받고 싶고, 서로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죽은 자는 살려는 열망이 없듯, 예수를 믿어도 그 영혼이 살아 있지 못한 자는 영적으로 살려는 열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리는 영’이라고 했으니,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돼야 하고, 그 생명의 힘으로 육신을 들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났지만 예수께서 무덤 문을 열라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하고 부르십니다. 그때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왔는데, 육신이 아닌 그 영혼이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육신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육신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 육신을 움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고 했으니, 우리는 육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이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만이 영원히 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분

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욕심을 부리고 거짓에 속을까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마귀는 거짓의 아비, 욕심의 아비, 살인의 아비, 즉 죄의 본질(本質)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최초에 죄를 지은 종자(種子)요, 죄를 인류에게 퍼트린 종자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된다”고 속여서 욕심부리게 합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별의별 것을 다 주어도, 그 영혼이 죽어 버린 사람의 말로(末路)는 비참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공급되지 않아 육으로 돌아가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니, 사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생명은 제한 없이 공급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예수 생명의 피는 영원히 살려는 자의 몫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욕심부리지 말고 거짓말하는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상실한다는 것은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생명을 상실한 게 죄인데 죗값은 사망으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면 끝나지만, 우리 영혼은 영적 존재이기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지옥에서 사는 것은 죽는 것이요, 천국에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니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미혹해서 생명을 상실하게 합니다. 아담의 생명을 상실케 만든 놈이 마귀역사요, 마귀는 지금도 우리 생명을 빼앗아 가려고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으려 몸부림칩니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지금도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역사가 온갖 수단 방법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속이고 욕심부리게 하고 어떻게든 죽여서 지옥에 보내려 합니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원수를 알고, 보고, 이기도록 영안이 열리고, 영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하나, 영이 죽어 버리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원해서 우리에게 죄를 보게 하시고, 마귀역사를 알게 하시고,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우리는 다시는 생명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주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죄로 죽을 죄인인데,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내놓으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예수께서 영원히 사신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잘된 것을 복(福)받았다며 자랑하고, 육신의 욕심을 채우면 그것을 복으로 압니다. 과연 그에게 복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에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곧 목숨이 끝날 때 천국에서 사느냐 지옥에서 사느냐를 뜻합니다.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복 있는 사람이 되려고 말씀 듣고 있고, 예수 생명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절대적인 복을 얼마나 열망합니까. 육신은 허망한 것입니다. 지금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니까 오늘처럼 내일도, 내년도 평안할 줄 알지만, 고통이라는 장애물이 질병·사고·천재지변 등 어떤 이유로 불현듯 인생에 개입할지 모릅니다.


생명을 상실하면 기독교는 무너집니다. 생명 있는 곳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데, 죽은 나무에서 무슨 열매를 기대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신 그 생명의 힘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생명을 주신 그분과 더불어 살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종교가 있습니까. 양심적으로 살게 하고, 도덕을 함양하고, 박애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종교는 얼마든지 있어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참된 신앙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하늘에서 주신 생명의 떡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생명 없는 광야를 말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나무가 자라지 않습니까. 여러분 심령 속에 그런 생명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은 생명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어 하나님 자신과 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 생명을 가졌다면 생명이 고갈되지 않기 위해, 항상 더 큰 생명을 얻으려고 항상 말씀을 듣고 은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없이는 내 생명을 파괴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수단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우리는 다른 수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먹는 양식은 인간의 육체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에 불과하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발전소가 고장 나지 않는 한 전기를 공급하면 계속 불이 들어오듯, 하나님의 생명의 발전소는 영원히 존재하기에 그 발전소에서 공급하는, 아들로 주시는 생명이 내 안에 풍성하게 계속 공급됩니다.


예수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은 그런 떡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먹고 영원히 죽지 않을 살아 있는 생명의 떡이라는 말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 떡을 먹고 내 생명이 살았으니, 하나님의 아들은 나의 떡이요,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로 주신 영원히 사는 생명,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었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일은 내 육신에 어떤 의식을 갖고자 함도, 윤리나 도덕과 양심의 이성적 개혁을 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하늘에서 주신 생명의 떡을 갖고자 함입니다. 주가 주신 생명의 떡으로 영혼이 살고 주가 주신 생명의 피로 죗값인 사망을 파괴하고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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