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신령한 건축을

등록날짜 [ 2021-02-13 11:37:24 ]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 신앙생활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 집을 짓는 것


주님께 드릴 영광을 위해
내 영혼의 유익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지어야 할 내 집
우리 신앙생활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구속의 은총의 터입니다. 이 터 위에 집을 짓되 무엇을 가지고 집을 짓든지 하나님께서 영적생활의 공력을 시험할 때가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공력이 불타버리면 그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겨우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같이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불에 타도 무게만큼 가치가 남아 있는 금이나 은처럼 공력이 그대로 있다면, 즉 내가 신앙생활 한 삶이 그대로 주 앞에 있다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구원의 터 위에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충성과 순종과 전도와 예배로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충성하다가도 육신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지금까지 충성했는데, 하나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을 봅니다. 공력이 하루아침에 불타버리는 것이요, 그런 사람의 신앙생활은 깊숙이 들여다볼 때 불타 없어지는 짚이나 나무로 집을 짓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터 위에 구속의 은혜 감사해서 집을 짓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재료로 집을 짓고 있습니까? 지금 주님은 일생의 작품을 어떻게 낼 것인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구원주 앞에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신앙생활의 본질을 알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해 깨뜨린 하나님의 축복
천지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을 보시며 심히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창1:3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시한적으로 있다가 사라질 것도 지으셨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경험할 영적 존재인 사람도 지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인간을 육체라 하지 않으시고 ‘생령’ 즉 영적 존재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지었으나 영혼은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격적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가지고 주님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영원토록 영광을 돌릴 귀중한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어마어마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직분도 주셨습니다(창1:26~28).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우리 인간은 어떤 기능을 나타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사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히1:3).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인간 역시 형상의 모양대로 지어졌기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 하셨고, 자기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막16:17~18, 요14:12).


전인격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살리려 대신 죽으신 예수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거역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창세기 2장 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을 인격적으로 타락시켜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그럴 듯한 말로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창3:5).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순간 정녕 죽음이 왔고, 이제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도,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법도 다 깨져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을 그대로 두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죽으면 생명이 죽어서 지옥에 가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바싹 바싹 끼쳐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계획과 섭리를 세우셨으니, 자기 품 안에 함께 있던 독생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영은 인류의 죗값을 대신해 피 흘려 죽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야 정녕 죽으리라는 죽음을 대신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죽음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하게 하시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도록 신령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하나의 나무에서 가지가 계속 분리되어 나오며 같은 열매를 맺듯,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한 이후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는 한 사람으로부터 왔으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영생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죗값을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예수를 죽일 만큼 죄인임을 회개한 자에게 영생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8:1~2).


“정녕 죽으리라”는 사망의 법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법대로 죽으시는 순간, 내가 죽어야 할 문제는 예수가 죽어 해결하고 나는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산 자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터 위에 충성과 예배와 전도와 순종과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세워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매우 값비싼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인류 구원이라는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사53:5~6, 막10: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대속물이 되어 하나뿐인 목숨을 지불하고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마20:28).


하나님은 마귀, 사단, 귀신, 하나님의 원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원수 짓을 하고 감히 하나님이 되어 보겠다고 죄를 범한 인간을 지옥에 넣어 영원히 고통당하도록 해도 속이 풀리지 않으실 텐데, 인간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멸망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아들 예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어 우리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죗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살려 내셨다니 이런 큰 은혜가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큰 은혜의 값을 모르고 너무 싸구려 취급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죽도록 충성해 주님 만나는 날 당당해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모든 저주와 죄악을 짊어지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행악자 중에 행악자, 죽여 없애야 사회에 유익할 죄인들만 못 박아 죽였는데, 만약 십자가형을 받은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그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이사 가서 성씨까지 바꾸고 살아야 할 만큼 저주스런 처형입니다. 그런 저주스런 십자가에서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그토록 잔인하게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성취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작품, 바로 공생애입니다(빌2:5~11).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책임지려고 해야 합니다.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반드시 그의 죽으심의 은혜로 구원받아야 하고, 예수가 죽어 주신 십자가 피의 공로에 감사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책임 짓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책임을 짓는 감사, 책임을 짓는 예배, 책임을 짓는 순종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피 흘리셨다’고 하는 것은 그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감상적인 일이 아니라 나 때문에 행하신 실제 사건이요, 사실이기에 내가 회개하고 죄 사함 얻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터 위에 당신은 무슨 집을 짓고 있습니까. 무슨 공력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얼마 전 눈이 많이 왔을 때, 교회에 가서 눈이라도 쓸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내 죄를 짊어지고 책임을 지고 대신 죽어 살려 주셨는데, 나는 목숨을 거는 일도 아닌데 주님 일에 작은 책임이라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초해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보니 제자들은 주를 위해 다 드리고, 주를 위해 죽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그런 작품을 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로 구원받지 못했다면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작품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아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영혼의 때를 위하여 일하고,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님을 위해 일해서 주님 오시는 날 어엿이 염치 있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주님과 사이에서 그런 생각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님을 위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한번 가 준다는 식으로 마치 누군가를 위해서 신앙생활 해 주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터가 존귀한 줄이나 알겠습니까. 그 터 위에 주님 영광을 위해, 내 영원한 유익을 위해 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 드릴 영혼 구원이라는 작품을 내자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 구원의 작품’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잔인하게 찔리고 상하고 저주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피 쏟아 처절하게 죽으셔서 순종의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참혹한 고통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찢은 것은 구원받은 인류 모두에게 영생과 천국이라는 영원하고 신령한 복을 주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작품입니다. 아들의 생애는 하나님에게는 최고의 작품이요, 우리에게는 은혜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이 은혜 앞에 우리는 ‘충성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감사해야 하는데 물질이 없어서, 순종해야 하는데 상황이 안 되어서 못한다.’고 하며 육신의 상황에 매여 신앙생활을 제한받고 있지 않습니까. 아들을 죽여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얼마나 주님을 무시하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행할 전도 사역을 명령하셨습니다. 인류 구원 사역의 연장선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은 초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이요, 우리는 초림하신 구세주의 피 공로로 구원받았으니 이 은혜를 땅끝까지 전해 신랑 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주를 위해 복음 전한 작품을 들고 신랑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정혼을 하고 나면 신부는 신랑이 올 때까지 열심히 신랑을 맞이할 혼수품을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곧 우리의 혼수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랑 앞에 옳은 행실은, 신랑이 명령한 것을 다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해 죄 아래서 육신이 끝나는 그날 수많은 영혼이 당해야 할 참혹한 지옥의 형벌을 해결해 주시려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셔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일을 완성하셨으니 이제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완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오실 때 작품이요, 신랑을 맞이할 혼수품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복음 전하다 순교당하고, 옥에 갇히고, 주님 주신 전도 사명을 순종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설교 듣고 “아멘”은 하면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내가 행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단 한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6:38~39), 우리는 왜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코로나 때문이라며 핑계만 대고 있습니까?


영적 작품을 넉넉히 준비해 영원한 부유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17).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양을 먹이고 있습니까?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안 지킨다면 그리스도가 닦아둔 터 위에 아예 집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최소한 감사의 행동마저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살 찢고 피 흘려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은혜의 터 위에서 ‘나는 이분을 위해서 반드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라는 신앙양심이 터럭만큼도 발동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신부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해 신령하고 영원한 집을 하늘나라에 짓는 영적생활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주님이 내 것을 예비할 어떠한 자원을 주님께 올려드렸습니까?


인생이 마감되기 전까지가 주님께 드릴 작품을 만들 기회입니다. 육신이 종결되는 날 내가 예비한 집이 없다면 얼마나 참혹하고 비참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이익을 내지 못하고 한 달란트를 감췄다가 그대로 가져온 종을 향해 주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하시며,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마25:19~30). 작품이 없는 자의 최후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 구주 예수께 드릴 신령한 영적 작품을 넉넉히 준비했다면 영광스러운 칭찬과 기쁨이 넘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그날은 무섭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는 없습니다. 제자와 같이 기도하고, 성령 충만합시다. 성령 충만하여 권능을 받읍시다. 성령의 사람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주님의 최후 명령을 수행하여 예루살렘에, 유대에, 사마리아에 그리고 땅끝까지 예수를 증거 해 최상의 작품을 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최후 명령을 수행하고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복된 사역을 하다가 제자들처럼 죽음으로 작품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그 영혼의 때가 복되며, 신랑을 향한 그 진실한 사랑의 작품을 낸 기쁜 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중단 없고 후회 없는 영적생활을 기도로,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구령의 정신을 실천하여 인류 구원의 작품을 냅시다. 사도 바울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롬14:7~8). 주님이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했으니 우리는 죽도록 충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 죽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인격적인 양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주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기도합시다. 성령 충만합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영혼 구원의 작품을 들고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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