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생활1·29] 스스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되라

등록날짜 [ 2018-12-12 00:05:09 ]

신앙생활 주체는 하나님 말씀 

강이나 바다에 물고기들이 죽어서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파도를 따라 흉물스럽게 떠내려가다가 다른 물고기의 밥이 되어 사라집니다. 신앙생활도 생명이 없으면 죽은 고기가 물 위를 떠다니듯이 이리저리 흘러 다닙니다. 이처럼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내 육신의 소욕이 원하는 대로 그냥 떠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리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여기서 이렇다고 하면 이렇게, 저렇다고 하면 저렇게 표류합니다. 이러한 삶은 분위기와 감정에 따라, 타인에 따라 움직여 가는 삶입니다. 분명한 주체가 없고, 자기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 신앙을 움직여 가는 주체가 자기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그 말씀이 확실하게 들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성이 분명하지 못하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됩니다. 

신앙관이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내가 사는 동안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시고, 그 아들이 흘리신 피로 나를 멸망과 지옥에서 구하여 구원받게 하신 것에 감사함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겠다’는 고백 속에서 바른 신앙관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 모든 가치를 두고, 그 가치만 겨냥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관입니다. 이런 신앙관이 정립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을 때까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예수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생활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히 나를 사랑해 주는 말씀을 들어 본 사실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영적생활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신앙의 가치관만 분명하게 있으면 다른 잡념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무의 소망은 오직 하루를 살더라도 열매를 맺고 죽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죽어도 주님 뜻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을 지옥에서 구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감사하는 신앙 양심 가운데 분명한 신앙관을 정립하기를 바랍니다. 


수동적인 신앙생활 아닌 능동적인 신앙생활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늘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딱지 치고 놀고 싶은데 아버지는 자꾸 공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방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이미 다 외워 놓은 교과서를 읊어 대며 공부하는 척합니다. 그 시절에 어른들은 소리 내서 책만 크게 읽으면 공부 열심히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제가 열심히 하고 있는 줄 압니다. 공부하라고 하면 그냥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해서 보니까 공부는 나를 위해서 해야 하고,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이제 공부 그만하고 자라고 해도 스스로 열심히 합니다. 나를 위한 일이니 내가 알아서 잘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도무지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스스로 나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배드릴 때 시간 잘 지키고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받으라고 누군가 말해 주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살고 싶고, 영적으로 성공하고 싶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오히려 자존심 상해야 할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신세 생각해서 스스로 해야 합니다. 누가 하라 말라 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해야 하고, 내 자신을 위해서 안 하면 안 되는 필연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어미닭이 알을 품고 아무리 열을 가해도 생명이 속에서 부화되지 않으면 썩어 버립니다. 육체의 힘과 육신의 능력으로 하는 일은 싫어도 억지로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억지로 교회에 온 사람에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전해도 그 사람이 은혜받겠습니까? 그 사람은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릴 것입니다. 그 속에 전혀 생명이 안 들어갑니다. 신앙생활은 생산적인 것이요,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살려고 스스로 몸부림치는 생명력이 제일 중요합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서 성장하여 모이를 쪼아 먹으면서 본능적으로 생존경쟁을 통해 삶의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음으로 내 안에 부화된 예수의 생명을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망할 곳은 피해 다니고, 죄와 불의를 이겨 가면서 나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존 전략입니다. 신앙생활을 위한 생존 전략이 병아리만 못하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속에 분명한 생명이 있어야 하고 이 생명을 보존하려면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간절히 원하지만 무관심에 결박당하고, 싫증에 결박당하고, 피곤에 결박당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행동하려고 하면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이 마귀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갇히고 붙들리면 안 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0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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