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88)] 말세일수록 우리 삶의 초점은 오직 예수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88)

등록날짜 [ 2015-09-16 01:03:31 ]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사정은 몰라도 상관없으나
영혼의 때에 누릴 영광에는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우리는 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생전에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일찍 오실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생애에 주님이 오실 줄 믿고 신앙생활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신앙생활을 잘못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를 테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루 천기는 구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마16:3).

우리는 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몰라도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그 시대에 나타나는 표적만큼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급변하는 21세기 세상 풍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추지만 우리는 예수께 맞춰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오직 예수! 우리의 목적도 오직 예수! 주님의 재림에 맞춰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목적
시골에 살 때 소나기가 쏟아지면 마당에 널린 찌꺼기들, 길가에 뒹구는 낙엽들, 흩어져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빗물에 휩쓸려 도랑을 향해 마구 떠내려갑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월이라는 격랑 속에 다른 것들과 함께 휩쓸려 떠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는 영원한 반석 위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반석이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 풍조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림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재림을 기다린다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기다림’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거나 아버지가 잔칫집에 가시면 돌아오실 때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혹시 떡을 가져오지 않으시나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약혼한 처녀가 결혼 날짜를 앞두고 신랑을 기다리면서 ‘혹시 떡 좀 안 사 주나?’ ‘돈 좀 안 주려나?’ 하고 기다린다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일입니까?

우리가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면서도 ‘복 안 주시려나?’ ‘돈 안 주시려나?’ ‘사업을 형통하게 안 해 주시려나?’ 하며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신랑이 재림하시면 바라던 모든 것이 신랑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고 주님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주님이 인정하실 바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주를 사랑하는 믿음
제 어머니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늘 아버지를 걱정했습니다.

“저러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면 지옥 가신다. 아버지가 너희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셨으니 어떻든 예수 믿고 천국 가시게 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핍박으로 몇 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나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아버지 영혼이 지옥 갈까 봐 온통 거기에만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철이 들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서 영혼을 사랑하시는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믿음으로 영혼을 사랑할 줄 아는 진실한 사랑에 큰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한번은 처가에 갔더니 장인어른이 고백하십니다. “내 한 몸 죽어서라도 교회가 잘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평소 교회를 사랑해서 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시던 모습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어른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교회 걱정을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끝까지 교회를 사랑하다가 세상 떠나신 장인어른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살면서 주님 일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며 주님 일로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상하기도 합니다.

주님 일 때문에 인생 모든 길이 좌우되는 사람이 되어 신랑을 향한 관심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관심이 내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사랑의 극치는 이웃 영혼 사랑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창기와 더불어 탕진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못하고 기다리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가슴에도 불신자를 향한, 주님을 향한, 성도를 향한 사랑이 탕자의 아버지처럼 새록새록 올라와야 합니다. 사랑 없는 기독교인은 송장과 같습니다. 사랑 없는 것은 추태 부리는 일입니다.

“마지막 때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한 말을 달리 해석하면 주님과 관계가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세대가 말세입니다.

가을에 주님이 얻고자 하는 바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가을에 사랑의 열매가 없이 다 낙과(落果)하고 거둘 것이 없다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풍요로운 농장에서 자란 나무가 되어서 주님께 제한 없이 열매를 드리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라는 칭찬을 들을 만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주님이 인류를 향해 사랑을 제한할 수 없듯이 나도 내 안에 있는 주님 사랑을 제한하지 말고 제자처럼, 바울처럼 죽기까지 그 사랑을 뿜어내야 합니다.

순교하기까지 뿜어내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이런 사랑 없이 주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로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오해해서 속지 말고 확실한 사랑이 있는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항상 이 사랑이 넘쳐 예수 몰라 죄로 지옥 가는 이웃 영혼에게 복음 전하기를 바랍니다. 위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아래로는 내 영혼이 잘되게, 이웃 영혼이 구원받게 뿜어내는 사랑이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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