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께 돌아오길 소망하며

등록날짜 [ 2012-09-25 16:36:34 ]

처음 학생들과 만나게 된 건 2007년 중.고등부 하계성회에 참석해 보조교사 충성을 지원하던 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수양관에 온 아이들 모두가 은혜 받을 것을 사모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수양관 주변에 몰래 숨어서 담배 피우는 아이들, 그리고 은혜 받는 친구들 뒤에 숨어 주변인으로 시간 보내는 아이들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그런데 내겐 그 모든 학생이 사랑스러웠다. 회개하며 기도하는 아이들은 물론 예뻤지만, 진하게 풍기는 향수와 담배냄새가 몸에서 풀풀 묻어나오는 아이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외모의 아이들 역시 사랑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다독인 것이 계기가 되어 고등부 교사에 지원했다.

아이들은 은혜를 받으면 금세 변한다. 외모에서부터 언행과 마음 씀씀이까지 선하게 바뀌는 그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교사가 갖는 보람이구나!’ 하는 착각 속에서 이제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해보려는 내 울타리는 가람이를 만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계성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가람이는 집에서 교회까지 한 시간 사십 분이나 걸리는 장거리임에도 매 주일 예배에 잘 나왔다. 교회 오는 것이 무척 즐겁다며 해맑게 웃는 아이의 웃음에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람이에게 어두운 가정형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 주일 교회에 나오는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고 갈 때쯤이면 아내에게 부탁해 집에서 밥을 먹이고 돌려보냈다. 돈이라도 더 있으면 요즘 애들 입는 것처럼 옷이라도 해 입히고 싶었다.

그런데 한동안 가람이는 교회에도 우리 집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부모의 울타리 없이, 학원이라는 보호도 없이 도대체 이 아이가 갈 곳은 어디인가? 막대사탕의 달콤함에 이 썩는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어른들이 거는 유혹 속에 쉽사리 빠져드는 탈선 청소년들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정작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 아이는 무분별하게 방치된 모습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선생님, 나 살고 싶어요.”

많이 울었다. 내가 그 아이를 잡아주지 못해 그런 거 같아 정말 미안했고, 무책임했고, 나태한 교사 직분을 해 온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이날은 한없이 나의 잃어버린 열정을 탓하며 울었다. ‘어쩌면 난 너무나도 빠르게 세상풍속으로 빠져드는 이 아이가 진절머리났나 보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나 보다’ 자책과 회개가 터져 나왔다.

교사로 직분을 감당하며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나의 변덕이었다. 주님 심정 가지고 구령의 열정으로 예수 생애 재현하고자 했던 기도는 어느새 잊기 시작하고 또다시 매너리즘에 빠져들 때마다 나는 이 아이를 생각하며 기도의 시간을 줄이지 않는다.

영혼 관리는 죽도록 충성해야 맡겨진 학생들이 믿음을 떠나지 않으며,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에게는 반드시 구령의 열정과 기도가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늘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무장하는 교사가 되기를 다시금 소망해 본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30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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