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18> 한기춘 목사
곧은 성격으로 신앙의 강직함 빛나

등록날짜 [ 2010-02-01 12:00:40 ]



나라와 교단 발전 위해 후진 양성에 온 힘 다해

강경 고등성경학원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젊음을 쏟았던 한기춘 목사. 노년에 이르기까지 대전 침례회신학교 교수로 7년간 헌신했고 또한 서울 대한침례회신학교 교장을 맡아 8년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로지 후진들을 양성하는 길뿐임을 알고 전력을 다해 온 침례교단의 페스탈로치이다. 또한 곧은 성격에 정의감이 투철했고 계획을 세우면 탱크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며 일을 추진했던 한기춘 목사는 이 나라의 애국자이기도 했다.
늘 이 나라를 일으킬 단 하나의 길은 기독교뿐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침례교의 복음적 진리에 만족해했으며 교단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더구나 한기춘 목사는 한국 초대교회 부흥사로도 유명하다.


침례교단과의 만남

한기춘 목사는 1892년 7월 함경남도에서 한원갑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년 동안 한문을 공부하고 서당에서 훈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5세 때 국가고시에 합격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1911년 일제강점기 때 풍산사립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어느 날, 전도인에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1915년 함흥 성경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수료했다. 1918년부터 2년 동안 산으로 들어가 성경을 연구한 후 대영성서공회에서 권서로 일하였고, 1923년 장로교회에 조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또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수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탐구에 매진하였다. 당시 한학자이며 신학에도 권위가 있던 정빈 선생에게 성경을 배우며 공부하였고 정빈 선생을 통해 침례교단 펜윅 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성경을 깊이 있게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기춘은 침례교회로 전입하여, 침례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던 전도대에서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 원산에서 개최된 제25회 대화회에서 교사 직분을 받았다. 1933년 목사안수를 받고 경흥 구역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이후 만주의 간도구역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본격적으로 순회전도에 참여했다.
한기춘 목사는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부흥강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집회를 많이 열었는데 부흥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기춘 목사는 새벽기도에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능력으로 나타났다. 1977년 1월 3일 8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긴 뒤에도 그의 가정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가정예배를 지금도 드리고 있다고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진력

한기춘 목사는 침례교단이 든든하게 발전하려면 목회자 양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였다. 1949년 본 교단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이었던 강경고등성경학원에서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53년 대전에서 시작된 침례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7년간 젊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 1962년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침례회신학교에서는 교장으로 8년간 수고했다. 노후에 오직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았던 한기춘 목사는 1977년 1월 31일,  8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정리 김은혜 기자
자료출처<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7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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