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④] 표현의 한계와 복음 전파의 어려움

등록날짜 [ 2010-12-01 10:34:04 ]

겸손하신 예수 설명하기 위해 언어와 씨름하다
종교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것 쉽지 않아

소래에는 기독교 사역이 아직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소년반을 하나 만들었고, 마을 여성 중에서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안제경 선생 부인이 부인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해서 큰 만족을 얻었다. 나는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찬송을 가르치고 싶었다. 이 일은 찬송들이 번역되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어 어휘를 잘 모르는 까닭에 찬송 번역에 뛰어들기가 다소 겁이 났다. 그러나 “겁나는 게 있나? 그것이 자네를 겁내게 할 것”이라는 고향 친구의 말을 생각하고서 다소 어려움을 겪은 끝에 ‘예수 사랑하심은’, ‘나는 참 기쁘다’ 같은 간단한 찬송들을 번역했다.

‘겸손’이라는 관습 차이
그러나 본격적인 씨름을 한 것은 ‘보고 생명을 얻으라’는 찬송을 번역하면서 한국어로 표현하는 한국 관습과 부딪히면서부터였다. “너희에게 생명을 바치신다”는 문장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어에는 하인이 상전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바치는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한국 친구들 가운데 서너 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거 가당치 않은 일이오” 하고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야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천한 하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 같은 진토의 벌레들을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기 때문이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복음의 진리 아닙니까?” “아니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건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없는 이 동양의 친구들은 계속 고집하기를, “하지만 하인이나 백성이 자기 임금에게 무엇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바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이제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이해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하인의 자리에 내려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면, 우리로서는 겸손히 감사한 마음으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주의 왕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완강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하인의 자리를 취하셨다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종’인 예수를 설명하다
나는 한자어 성경 빌립보서 2장을 펴서 5절 마지막 구절부터 11절까지 읽어 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에 그들에게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는 말씀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성경 진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은 하였으나, 그 뒤의 행실로는 단지 종교적인 사람들임을 드러냈고,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왔음을 드러냈다.

세상 어디서든 ‘자연인’이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복음보다 관습이 더 크게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하인들이 여러분에게 하듯 그분은 두 손을 뻗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물을 걷어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했듯이, 진토의 벌레들과 같은 우리 앞에서 영광의 주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그 때 나는 ‘바치다’라는 한국어에 위와 같은 히브리어의 벅찬 감탄사를 첨가하는 즐거운 특권을 누렸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전까지 한국어에는 그런 용례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펜윅 선교사가 번역한 찬송가[

위 글은 교회신문 <21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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