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1>] 현지인에게는 현지 사역자가 필요함을 알다

등록날짜 [ 2011-01-19 11:39:16 ]

성경 공부로 청년들 가르쳤으나 모두 떠나
외국인으로서 깰 수 없는 벽 있음 깨달아

신명균 선생(초대 침례교인)은 맡은 일을 썩 잘했으므로 감독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사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보다 더 오랜 경험을 했고, 성경 내용에 좀더 익숙하고, 사람들을 다루는 데 좀 더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 조언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도 지칠 줄 모르고 내게 조언을 구했다. 신 선생이 내게 어려움을 끼친 게 있다면 그것은 그가 더 많은 권한을 차지하려고 한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려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었다.

내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유망한 청년들을 발굴하여 목회자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에 태평스럽게 세상에 젖어 살던 청년들 가운데 세 명을 지켜본 나와 아내는 성경 학교를 개설하여 청년들을 목회자로 양성하기로 했다. 당시에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그런 일을 시작할 만한 건물도 재정도 없는 어려운 현실에서 섭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이 너무 앞섰고, 전통도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보조 교사 한 명을 두고 청년 네 명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로 만들거나, 배운 사람이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한국의 인습에 그냥 젖어 있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 하에, 우리는 교과 과정을 편성할 때 오전에는 작은 농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하도록 정했다. 또 하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교육이 한 분야에만 치우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과목을 성경과 읽기, 쓰기, 셈으로 한정하였고, 교수 방식을 서양식보다는 동양식으로 하기로 했다.

성경 교육은 일정 본문을 자유자재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학생들은 재능과 기억력 정도에 따라 20번, 25번, 30번을 읽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모세 오경을 철저히 읽게 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이 늘 그렇듯이, 시험을 쳐 보니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유월절’(출13장)에 관한 시험이다. 첫째 청년은 사내답게 곧장 정확한 해석을 말했다. 그는 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교사가 자신을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셨는지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라고 가정하고서 전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둘째 청년도 과제를 잘해냈으나, 셋째 청년은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우리는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청년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그들이 새 은혜 언약을 전하는 사역자들로 성장하도록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따금 교회로부터 그들이 독선적이라거나, 신앙 연륜이 더 깊은 교인들 앞에서 더 많이 아는 체한다는 비판들이 간접적으로 들려왔으나, 우리는 시기심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일을 만나고 말았다.

지력이 뛰어난 보조 교사는 일반 사회에 나가도 쉽게 지도자가 될 만큼 많은 지식을 터득한 다음 돈을 벌기 위해 세상으로 나갔다. 첫째와 둘째 청년들은 4년 훈련을 마친 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선교사에게 설득을 받고는 그에게 넘어갔다. 제칠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과, 만약 자기에게 오면 적잖은 급료를 지불하고 앞으로 더 올려 주겠다는 제의에 넘어간 것이다. 그들보다 어렸던 청년은 영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뛰쳐나갔고, 넷째 청년은 일찌감치 지쳐서 세상으로 갔다.

원산의 믿지 않던 한국인들마저 우리에게 4년 동안 무료로 교육과 도움을 받고는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떠나 버린 청년들을 크게 비판했다. 한국인들은 동족이 외국인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그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들이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들이 백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동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호된 교훈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우리는 자주 눈물로 베개를 적셨고, 그들이 우리를 버린 일로 크게 상심했다. 이제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이 긴요한 사역에 최선의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철저히 실패한 곳에서 신 선생이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이야기를 하려 한다. <계속>『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사진설명> 신명균 목사와 그의 가족들

위 글은 교회신문 <22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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