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45)] 건국 세력들의 눈물겨운 애국심
전쟁 이전 막후 실력자들

등록날짜 [ 2013-12-24 09:56:29 ]

장면, 조병옥 등 경쟁자도 나라 살리려 하나 돼


<사진설명> 이승만과 덜레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맥아더와 함께, 6.25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덜레스는 미국이 빠르게 참전하도록 유도해서 대한민국을 살렸고,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미국 계획에 제동을 걸었으며 한미동맹까지 성사시켰다.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공을 들여 친분을 쌓았다. 두 사람은 조지 워싱턴과 프린스턴 동문이다. 미국 내 인사와 동문이라는 이승만 개인 프로필이 대한민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6.25전쟁 직전, 덜레스는 미국 국무부 고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장면 주미 대사는 즉각 서울로 와서 소식을 전하며 전략을 세웠다. 미국 정계 거물인 덜러스를 국빈으로 융숭히 대접했다. 또 무슨 일이 있더라도 38선을 꼭 시찰하게 하며, 가능한 한 국회 연설을 시키라고 건의한 후, 덜레스의 한국 방문에 따른 사전 준비와 공작을 펼치고자 서둘러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이승만, 장면, 조병옥은 경쟁자로 유명했다. 최고 지도자 자리를 놓고 이승만 대 장면, 이승만 대 조병옥, 장면 대 조병옥이 대결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 초기를 살펴보면, 그들은 명콤비였다. 유엔 한국 정부 승인, 덜레스 방문, 6.25전쟁 이후 대미 외교에서 성격과 개성이 전혀 달랐던 세 사람은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대사가 제안한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덜레스에게 한국이 처한 위험한 안보 상황을 보여주고 미국에 지원을 받아내려 노력했다.

이승만은 덜레스와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그들은 서로 높이 평가하며 존경했다. 반공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사상 노선 역시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눈 회담마저 화기애애하지만은 않았다. 이승만은 책상을 치며 미국이 펼치는 정책이 틀려먹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미국이 한국을 극동 방위권에서 제외해 놓고 군사원조조차 제대로 안 해 준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앞으로 크게 후회하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훗날 미국이 한국에 엄청난 지원을 할 때 이 일을 결정한 당사자가 덜레스였다는 사실 역시 이날의 만남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본 교토를 관광하던 덜레스는 6.25전쟁 급보를 받고 즉각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로 갔다. 그는 앨리슨 국장과 함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직접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개되어 미국이 빠르게 참전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장면과 이승만, 한국 정부가 들인 노력이 비극 중에도 결실을 보았다.

정부와 국민이 전쟁에 대비하려는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때 대한민국은 함정 36척을 보유했지만, 거의 어선과 다를 바 없었다. 번듯한 전함을 하나 갖는 일은 이승만의 염원이자 해군의 소원이었다.

그 비원을 모아 1949년 6월 ‘함정 건조기금 갹출위원회’가 발족했다. 나라에 돈이 없고 지원해 주는 외국도 없으니, 군인들이 허리띠를 졸라맸다. 해군은 봉급에서 성금을 뗐고 해군의 아내들은 천막에서 작업복을 지어 팔았다.

석 달간 노력하여 모은 돈이 1만 5000달러, 중고 전함 한 척을 살 돈이었다. 전함 구매단은 미국에 가서 450톤 급 전함을 샀다. 이미 퇴역해서 벌겋게 녹슨 배였다. 구매단은 수리공과 페인트공이 되어서 전함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해군 최초 전함에 ‘백두산함’이란 이름을 붙였다. 눈물겨운 과정을 거쳐서 우리 전력이 된 백두산함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백두산함이 움직일 때마다 눈물이 따라다녔다. 가는 곳마다 동포를 울렸다.

돛대에 태극기가 처음 걸릴 때는 군인이, 포와 레이더를 구하러 간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포탄을 사러 간 괌에서는 징용 갔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울었다. 처음에는 배가 초라했으나, 나중에는 대한민국 첫 전함이라는 뿌듯함에 눈물을 흘렸다.

백두산함이 진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반이 지나서 6.25전쟁이 터졌다. 백두산함은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부산항으로 접근하던 소련제 수송선을 대한해협에 수장시켰다. 거기엔 북한 특공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6.25전쟁 직전을 연구해 보면, 어느 결실 하나 저절로 되거나 공짜로 이뤄진 일이 없었다. 미국 참전, 낙동강 방어선 사수 모두 대통령과 국민 노력으로 달성했다. 건국 세력들이 눈물겨운 애국심을 발휘해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계속>

자료제공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6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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