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회계연도를 시작하며] 예수로 얻은 구원의 큰 영광을 위하여!
등록날짜 [ 2014-01-21 09:15:50 ]
인도 오지에서 20년간 사역하며 자신의 몸 아끼지 않아
죽음의 순간에도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으며 복음 전해
존 하이드(John Hyde)의 아버지는 일리노이 주 카티지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목회했다. 하이드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으로 기도와 예배에서 늘 모범을 보였다. 특히 하이드의 어머니는 이방 민족에게 복음 전할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때문에 하이드의 형제 10남매 중 2명은 중국 선교사로, 1명은 인도 선교사로 하나님께 쓰임받았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기까지
하이드는 1892년 매코믹(McCormick) 신학대학에 다녔다. 형인 에드먼드 역시 같은 신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해외 선교사를 자원한 에드먼드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형이 죽자 하이드는 큰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하이드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하이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운 일이라 생각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인도 선교에 지원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해 혈기왕성하던 하이드 마음에는 슬그머니 교만이 들어찼다. 위대한 선배 선교사들을 닮으려는 열정이 가득한 반면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는 교수직 초빙을 거절하고 인도 선교사로 자원했다는 자랑스러움 때문이었다. 선교할 열정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라기보다 자신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이드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이드가 배에 오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목사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너를 두고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라고 적혀 있었다. 하이드는 화가 났다.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인도 선교사로 새 삶을 시작하는 자신을 조롱하는 듯했다. 하이드의 내면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이드는 괴로워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지 내용이 옳고, 내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하이드는 기도했다. ‘성령으로 채워 달라’는 기도를 시작하자 자신이 보였다. 하이드가 그동안 품어온 마음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하이드의 영적 몸부림은 향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됐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와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이드는 깨달았다.
1892년, 인도에 도착한 하이드는 언어 공부에 들어갔다. 우르두어, 펀자브어까지 공부하여 정확히 구사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일이 하이드에게는 무엇보다 즐거웠다.
영적 부흥의 수단은 오직 기도
우리는 모두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해도 할 일이 많아서 기도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다고 둘러댄다. 즉,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할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드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앞세워야 한다는 진리에 충실했으며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람들의 오해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이드는 영적 부흥을 일으킬 수단은 ‘기도’ 이외에 없다고 생각했다. 1904년, 하이드는 시알코트 부흥 성회를 기획하고 기도로 준비했다. 성회 준비 위원으로 하이드를 비롯해 맥셰인 패터슨, 조지 터너가 함께했다. 하이드와 패터슨은 하나님 앞에서 집회를 두고 30일 주야를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9일 뒤에 터너가 합세했다. 세 사람은 21일 주야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했다.
외국인이나 토착인 가운데서 목사와 교사, 복음 전도자가 된 사람들을 영적으로 무장하게 하려면 일 년간 성경 공부 모임을 진행해야 했다. 이 사역의 시작점으로 제1차 시알코트 부흥성회를 열었다. 하이드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성령의 역사에 관해 설교했다.
설교 말씀을 전한 하이드가 하나님 은혜를 더 크게 체험했다. 마치 하늘에서 빛이 비치는 듯한 경험을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하이드는 깊이 깨달았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마음 문이 열렸다. 제1차 시알코트 부흥성회는 인도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는 출발점이 됐다.
하이드가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이적이 따랐다. 특히 하이드가 중보기도 하는 집회에서는 오순절의 부흥이 일어났다. 하이드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엄청난 회개가 따랐다. 사람들이 거듭나는 파도가 인도를 휩쓸었으며 사람들 행실이 변화했다.
하이드는 인도 오지 마을들을 순회하며 영혼을 구원하고자 땀 흘렸다. 하이드는 전도하러 가기 전에 여러 날을 철야와 금식 기도로 눈물을 흘렸다. 이런 기도의 힘으로 전도할 때 악한 마귀 권세가 떠나가고 오직 예수만이 나타났다.
1909년에 개최한 집회 이후로 800명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이드는 만족하지 않았다. 하이드는 결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더 많은 영혼이 예수를 영접할 수 있게 쉬지 않고 기도했다. 당시 인도 전역에 걸쳐 부흥회와 집회가 열렸다. 이때마다 하이드 선교사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모든 곳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하이드는 최선을 다했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며 지친 나날들을 보낸 흔적이 완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불처럼 토해 낼 때면 그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초췌한 기미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하이드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 어느 날은 주위에서 권유해 진찰을 받았다. 의사의 진단은 이랬다.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심장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옮겨갔군요. 본래 위치를 되찾기까지 몇 달이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6개월 이내에 죽습니다.”
의사의 경고에도 하이드는 주저하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라는 성경말씀 그대로 실천했다.
20년간 사역을 뒤로하고
1911년 8월 하이드는 20년간 달려온 인도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이드는 당시 의학으로 치료법이 없는 육종(肉腫)이라는 병에 시달렸다. 1912년 2월 17일, 하이드가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외쳐라!”였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7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