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수기]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를 찾아 나서다
이지혜 (가명, 여성, 40세, 연세중앙교회 북한선교국) ②

등록날짜 [ 2013-03-05 14:02:04 ]

사촌오빠에게 속아 중국 사람에게 팔려 갖은 고생 겪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다녔지만 결국 공안에 체포당해
북송되어 갖은 고문당하고 집으로 가보니 이미 풍비박산

<지난 줄거리>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김일성 숭배와 주체사상이 옳은 줄 알고 살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폭발 사고로 순직했지만, 나 몰라라 하는 노동당을 보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무너졌다.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고 어떻게든 먹고살려다 보니, 장터에 나가 강냉이도 팔고 온갖 고생을 하다 사람고기를 팔아 총살당하는 끔찍한 광경도 봤다. 어느 날, 사촌오빠의 제안으로 중국에서 돈을 벌려고 두만강을 건넜는데, 알고 보니 사촌오빠가 중국 사람에게 돈을 받고 나와 내 친구를 판 것이었다.


중국 생활은 그저 굶주림만 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차마 필설로 고백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는 탈북자 언니의 소개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던 중 2년째 되던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나오면서 잘못한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내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믿어져서 많이 울며 회개하였다. 그때부터 예배를 손꼽아 기다렸고, 설교 말씀이 무슨 뜻인지 차츰차츰 깨달아져서 늘 기도하고 성경책을 읽었다.

또 한동네에 같이 사는 친구를 전도하였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임신도 되냐고 묻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면 태(胎)가 열릴 것이라고 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갔다. 그 친구는 교회를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나오면서 기도도 하고 말씀을 듣더니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임신을 했다. 처음으로 전도했는데 열매를 맺으니 얼마나 기쁜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친구가 임신하면서부터 그 남편까지 교회에 나왔다. 나의 첫 열매인 그 친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만나 행복하던 것도 잠시, 당시 나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 촌장(마을 책임자)이 신고를 해서 공안에 체포되었다. 북송될 때 차에서도 족쇄를 차고 있었는데 북한에 갈 바엔 차라리 차에서 뛰어내려 죽어 버리자고 생각했으나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꽉 잡았다. 결국 죽기를 포기하고 2003년도에 중국 도문 다리를 건너 북송되어 00 보위부(경찰청) 구류소에 갇혔다.

구류소에서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앉아 다리도 못 펴고 구부린 채로 있고, 대소변도 다 그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승낙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바지에다 용변을 보아야 했다. 또 바닥에서는 이가 우리를 괴롭히는데 너무 긁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딱지가 따닥따닥 붙었다.

<사진설명>북한 감방에는 수감자를 다 수용할 수 없어 복도에서 재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여름철에는 먹는 물이 모자라는데 비가 와서 웅덩이에 고인 물을 길어오면 지키는 자의 눈을 피해 식사당번이 그 물을 가져와서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 한 명이 대장염에 걸렸는데 그 방 안 사람들에게 다 전염되었고 다른 방까지 전염되어 애를 먹었다. 어르신 한 분은 이렇게 살아 뭐하느냐고 벽에 머리를 피가 나도록 부딪히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결국, 대장염으로 아이 두 명과 어르신 한 분이 사망했다.

한 끼 식사는 상해서 냄새가 푹푹 나는 국수로 만든 죽을 두 숟가락밖에 주지 않았다. 영양 부족으로 여자들은 모두 생리가 멈춰 버렸다. 생리를 안 했기에 망정이지 대변을 보고도 닦을 휴지가 없어서 속옷을 벗어 찢어서 썼다.

감방 안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한족이 한 사람 있었다.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망해 간다고 알려주러 왔다고 했다. 두 숟가락밖에 안 되는 죽을 먹으며 끊임없이 기도만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대단해 보였다. 또 그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북한을 사랑하셔서 꼭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보위부에 한 달 있는 동안에 왜 중국에 갔는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하게 조사를 받았다. 조사받는 동안 매번 매를 맞았는데 남자들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여자들은 혹시 돈을 돌돌 말아 비닐에 싸서 항문 아니면 자궁에 넣고 나오는 일이 있다고 하여 옷을 벌거벗겨 놓고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50번 이상 시키고, 그래도 안 나오면 자궁에 손을 넣고 검사를 하는데 발각되면 매를 맞고 돈도 빼앗겼다.

다행히도 나는 처음이라서 용서한다며 단련대에서 며칠 일을 시키다가 담당 안전원이 와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가보니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이미 한 달 전에 굶주려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도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셨다는데 눈도 제대로 못 감으셨다고 했다. 중국에서 잡히기 전날 꿈에 어머니를 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너무나 억장이 막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여동생이 일하랴,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시중들랴 별별 고생을 다 했고, 남동생도 몇 년간 집을 나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붙잡혀 왔으니 이곳에서 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남동생은 내가 나라를 배반하더니 정신까지 잘못되어서 돌아왔다고 비난하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래서 남동생이 없을 때 여동생에게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신 사건을 들려주고 영접기도도 함께하고 기도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그렇게 여동생이라도 전도를 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하지만 그 깜깜한 세상에서 예배도 마음대로 드릴 수 없고 찬양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으니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탈북을 결심하고 어떻게 두만강을 건널지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결국 다시 탈북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전에 살던 교회를 찾아갔고, 그 교회에서 예수 믿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혹시 남자를 만나면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하나님 믿는 사람이면 된다고 기도한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해 주셨다.
그 당시에 나는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했다. 결혼 7개월 정도 됐을 무렵, 성경 공부 중에 갑자기 공안이 들이닥쳤다. 그냥 중국에서 살다가 붙잡힌 것은 괜찮지만, 성경 공부를 하거나 한국행 시도범으로 붙잡히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속>

/정리 이연희 기자



시(詩)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母性)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빵 사 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장진성 탈북시인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장진성 著, 조갑제닷컴)에서

위 글은 교회신문 <32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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