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전도받았다] 지속적인 섬김으로 신앙생활 도와줘 外

등록날짜 [ 2015-05-20 11:11:22 ]

지속적인 섬김으로 신앙생활 도와줘

 

여순애 집사(15교구, 58여전도회)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는 이는 여동생이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가족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는 동생이 탐탁지 않아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세월이 흘러 서른여덟에 늦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운영하던 논술학원을 정리하고 경기도 포천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시댁과 친정 제삿날에 으레 가서 제사 음식을 만들며 우상숭배를 도왔다. 그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 생일이면, 용돈 봉투와 함께 부적을 선물했고, 절에 자식들의 이름을 올리고 축원을 부탁했다.

 

아래윗집에 사는 이웃들이 예수를 믿어서 나를 전도했지만, 남편이 몹시 싫어해서 차마 교회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펜션 사업을 하던 남편이 과로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 돌을 앞둔 딸을 두고….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 몹시 괴로웠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남편의 사업장과 살던 집을 정리하고 큰언니가 사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게 7년 전이다.

 

이사를 앞두고 광명에 잠시 들렀을 때였다. 16년 전부터 친하게 지낸 박정희 집사 부부가 자기네 교회에 오라고 초청했다. 교회에 간 날은 이웃초청 예수사랑큰잔치 날이었다.

 

그 후 광명으로 이사했다. 박정희 집사네는 철산동이었는데 모든 예배 때마다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 섬김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처음 하는 신앙생활이라 모르는 것이 많은 나를 위해 박 집사 부부는 토요일마다 심방해 주었다. 신앙생활에 관해 세세히 알려 주고, 자신의 신앙 간증을 들려 주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다. 때로는 사람 관계 때문에 힘들어할 때면 격려해 주었다.

 

“언니, 사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봐.”

 

나중에 들어 보니, 박정희 집사 부부는 나를 전도하려고 오래전부터 수많은 시간을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박 집사 부부의 섬김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에 정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진실하게 예수를 믿게 되자 큰언니가 핍박을 했다. 처음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제사와 명절에 어머니 혼자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제사 음식 준비를 도왔다. 하지만 제수를 장만하는 것도 우상숭배인 것을 알고 나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명절과 제사 때 음식을 일절 만들지 않자(고전8:10~12;10:14~22) 큰언니와 형부가 나를 핍박한다. 가슴이 아프다.

 

그런 큰언니 부부에게서 과거 예수 믿는 동생을 핍박하던 내 모습이 보였다.

 

‘언니도 나처럼 예수 믿을 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라는 소망을 품어 본다. 내게 핍박받던 여동생은 지금 필리핀 선교사로 사역 중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하심으로 일하셨다. 딸이 리틀글로리아 찬양을 하게 되었고, 신앙생활 잘할 수 있게 연세중앙교회가 있는 구로구 궁동으로 이사하도록 인도하셨다.

 

박정희 집사 부부는 지금도 내 신앙생활에 가장 큰 ‘기도 동역자’이자 ‘섬김이’다. 지금도 눈물의 기도와 진실한 교제로 섬겨 주어 박 집사 부부에게 참 고맙다.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시절에 나를 만나 주신 주님. 지금은 ‘내 인생에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수 있나!’라고 느낄 만큼 구원의 감격에 겨워 살고 있다. 죄와 사망, 지옥에서 나를 살려 주신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

 

막내동생의 끈질긴 기도와 전도로

 

동덕화(12교구, 36여전도회)

골수 불교 집안에서 자랐고 시집도 불교 집안으로 갔다. 시삼촌이 주지승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불교와 관련된 곳이면 무조건 시주하고 절했다. 맹목적으로 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2남 3녀 중 막내여동생(동해경 집사)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녀 늘 나와 대립각을 세웠다. 불교에 빠져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동생은 항상 예수를 전했지만, ‘예수’ 소리가 듣기 싫어 동생을 피하기 일쑤였다.

 

10년 전, 큰오빠가 재생불량성빈혈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자 동생은 남묘호렌게쿄를 믿던 오빠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어코 연세중앙교회로 인도했다. 3개월 동안 뜨겁게 예수 믿던 오빠는 숨을 거둘 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 모든 장례 절차를 연세중앙교회에서 주관했다. 기독교식 장례 절차나 조문하는 성도 모두 자기 집안 장례처럼 마음을 써 주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2년 후, 큰언니마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투병생활을 했다. 언니도 역시 오빠와 같은 종교를 믿었는데 복음 전하는 동생을 나보다 더 싫어했다. 오죽 싫었으면 동생과 연락을 끊고 살았을까. 그런데도 언니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고 동생은 연세중앙교회 지역장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의식 없는 언니 앞에서 기도하는 그들이 너무 미웠다. 동생에게 눈치를 줬고 지역장은 아예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전도사가 와서 몇 분뿐인 면회시간 동안 언니에게 눈물 콧물을 흘려 가며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의식 없던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의식이 없는데도 듣고 있었나? 그리고 이 전도사는 남을 위해 왜 이렇게 눈물 콧물을 쏟고, 땀 흘려 가며 복음을 전하는 거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언니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더니 면회가 끝난 지 얼마 안 돼 숨을 거뒀다. 언니의 장례도 연세중앙교회가 주도해서 치렀다. 서울에서 멀리 강원도까지 교회 차로 오가며 예배드리고 섬기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감사와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 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오빠가 보여 준 미소, 의식 없던 언니가 전도사가 전한 말을 알아듣고 흘리던 눈물이 계속 떠올랐다.

 

‘동생이 그렇게도 전하려 한 예수,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남묘호렌게쿄에 빠져 있던 오빠와 언니가 달라졌을까?’

 

동생이 그렇게도 소원했던 연세중앙교회에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우선 교회 규모와 성도 수에 놀랐다. 하지만 처음 듣는 설교 말씀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처럼 통 믿어지지 않았다. 동생은 한 달만 다녀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거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 윤석전 목사님이 전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 내 심령에 꽂혔고, 그간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숭배 한 죄가 얼마나 큰 죄였는지 깨닫게 됐다.

 

올해 7년째 나는 지금 예수로 무척 행복하다. 예수를 만난 이 기쁨은 지금껏 살아온 날 중 가장 큰 기쁨이고, 앞으로의 큰 소망이다. 지금 헬몬찬양대에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 드리고 있다.

 

내가 하나님 자녀 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했을 동생이 고맙다. 또 동생을 기도케 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영혼 구원의 열정의 기도는 이렇게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나 또한 한 사람의 전도자가 되어 아직 예수를 모르는 시댁을 놓고 오늘도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부르짖는다. 남편과 골육친척들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구하리라. 그들이 주님께 돌아올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리 김지영 동해경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3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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