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우리문학이야기(2)
변치 않는 상록수의 얼과 신앙 - 심훈의《상록수》와 최용신의 순교자적 삶

등록날짜 [ 2008-04-16 11:13:37 ]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을 떠라.” 귀에 익숙한 이 말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문장이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 15주년기념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된 작품이다.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을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작가 심훈의 이름과 함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농촌운동가 최용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계몽소설의 전범으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는 작품의 후광으로 존재하는 실제 모델인 최용신에게서 힘입은 바가 크다. 최용신이 소천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경기도 안산의 샘골교회에서는 매년 3·1절마다 최용신 선생의 정신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 일대가 상록수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7년 11월에는 상록수공원 안에 최용신기념관이 건립되어 상록수의 얼과 신앙으로 아로새겨진 최용신의 순교자적 삶을 기리고 있다.

민족을 사랑했던 믿음의 여인

최용신이 태어난 함경도 두남리는 원산읍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래되어 개화된 마을이었다.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목 전희균 목사와 서울의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의 황에스더(黃施德) 교수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최용신은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을 계몽하는 것만이 민족이 살 길이라는 확신 가운데 자신의 짧은 생애를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바쳤다.
최용신은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유학 도중 각기병으로 인해 귀국한 후 기독교단체인 YWCA의 농촌파견 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 천곡리(샘골: 현재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송되었다. 그녀는 기독인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맞서면서 처녀로서의 수줍음도 잊은 채 낮에는 논에서 모를 심고 밭에서 김을 매며 땀흘려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서 110여 명이 넘는 아동들에게 한글, 성경, 산수, 재봉, 수예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35년, 장중첩증(腸重疊症)이란 병으로 최용신이 소천하자 천곡마을 사람들은 사회장으로 그녀의 장례를 치렀으며 1,000여 명이 넘는 조문객의 애도 속에 강습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그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녀는 생명바쳐 사랑했던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랑하는 주님과 학생들의 이름을 “주여, 주여! 종렬아, 명희야, 숙자야…”하며 애타게 부르다가 25년 6개월의 불꽃같은 생애를 마쳤다.
자신의 꽃다운 삶을 민족제단에 바친 최용신은 천곡강습소의 교장 겸 교사로서, 마을 주부회와 청년회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천곡교회의 충성된 여종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 없이 실천한 천곡마을의 여선지자였던 것이다.

21세기 신상록수 운동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21세기 신상록수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운동은 최용신 선생 같은 선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어려움에 처한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돕자는 생명나눔 운동이다. 이를 위해 1,000여 개의 도시교회들이 서로 협력해서 구매자인 도시교회의 성도들과 생산자인 농어촌교회의 성도들을 맺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의 삶을 민족제단에 바쳤던 최용신 선생의 순교자적인 삶은 변치 않는 상록수의 얼과 신앙이 되어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의 영적인 삶 속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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