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클래식 음악 친해지기④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 충직한 하인 정신이 빚은 불후의 명곡

등록날짜 [ 2009-05-11 18:23:28 ]

2009년 클래식음악계는 헨델(1685-1759) 서거 250주년, 하이든(1732-1809) 서거 200주년, 멘델스존(1809-1847) 탄생 200주년이라는 굵직한 기념행사들을 열고 있다. 그중 하이든은 그 이름의 명성에 비해 알려진 바가 비교적 적은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도 교향곡 ‘놀람’ ‘큰북연타’ ‘고별’ 등 부제가 달린 곡들 위주로 이름만 알지 제대로 한번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에 대해 알아보자.

소년성가대에서 음악가의 꿈 키워
오스트리아 로라우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에게 가서 교육을 받았다. 1740년에는 빈의 성 스테파노교회의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성가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그런 생활이 10년간이나 계속되는 동안 때론 작곡을 배우고 때론 음악교사가 되기도 하며 근근이 생활했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에 취임했고,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했다. 그러다가 백작의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했다. 1761년 5월 1일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부악장에 취임했고 1766년부터는 악장으로 승진했다.

100여 개 교향곡 작곡한 음악의 종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집에서 그는 거의 30년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했다. 그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등 실내악·피아노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아 4중주곡》을 완성했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했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명예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했는데,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했다.

교회음악으로 되돌아온 만년의 대가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특히 천지창조는 평소 흠모하던 헨델의 대표작《메시아》의 영향을 받아 쓴 작품으로 《메시아》와 필적할 만한 3대 오라토리오 중 하나로 뽑힌다. 소년시절 성가대에서 자라온 하이든에게 교회음악은 어쩌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훌륭한 교향곡과 교회음악을 작곡한 하이든이 동시대 작곡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한 귀족<에스테르하지>의 하인처럼 보인 것이 음악가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순종을 아는 음악가였고 그것은 어렸을 적부터 교회의 성가대원으로서 받아온 교육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충성을 다한 음악의 종이었다고나 할까. 교회와 사회 어느 곳에서나 충직한 머슴의 정신이 필요한 이때에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며 그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위 글은 교회신문 <1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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