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인생의 숭고함 음악으로 표현한 베토벤
클래식 음악 친해지기- 베토벤

등록날짜 [ 2010-03-17 09:35:14 ]

거친 일생 통해 깨달은 ‘기쁨’ 음악으로 승화
핍박과 어려움 견딘 후에 승리의 면류관 봐야

 

흔히 가장 위대한 음악가를 뽑으라면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이든, 아니든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년)을 뽑을 것이다.

클래식음악에 전혀 문외한이라 하여도 그의 교향곡 5번 ‘운명’의 “짜짜짜 잔~” 하고 시작하는 부분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또한 음악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베토벤. 그의 음악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기에 많은 사람의 사랑과 추종을 받는 것일까.

좌절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의지
음악에는 가장 중요한 3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멜로디, 리듬, 화성이다. 그중 첫 번째로 꼽는 것이 멜로디인데 사실 베토벤의 작품에는 그다지 훌륭한 멜로디를 찾아볼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운명’ 교향곡도 그 시작의 카리스마 넘치는 “짜짜짜 잔~” 하는 부분을 돌이켜 생각하면, 거기에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네 개의 8분 음표의 연타(연속적으로 치는 리듬)밖에 무엇이 더 있는가. 그렇지만 베토벤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볼품없는 리듬의 연속된 모티브(동기)를 가지고 장장 한 시간가량의 분량으로 발전시키고 변형시키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담은 듯 표현해가는 모습을 보며 예술가로서의 숭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운명의 거대한 힘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 온갖 좌절과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실제로 이 교향곡을 썼을 때에는 그의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고 참고 이긴 자의 최후의 승리(그것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뜻하리라) 등 인간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 음악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베토벤의 음악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노력가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훈련과  핍박으로부터 나온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베토벤을 당시 신동으로 전 유럽을 휩쓴 모차르트처럼 키우고 싶어서 그를 혹독하게 연습시켰다고 한다. 성격 또한 괴팍해서 잠자는 베토벤을 깨워 온갖 술주정과 구타를 일삼았다. 일설에는 그때의 구타가 베토벤이 청력을 잃게 되는 데에 일조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정신은 강인해졌고 후에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상황, 곧 청력을 잃게 됨에도 결국 다시 일어서는 의지를 발하게 된다.

수정 거듭하며 불멸의 교향곡 탄생
‘운명’ 교향곡의 처음 스케치한 악보를 보면 실로 수십 번을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첫 부분의 시작을 좀 더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들리지 않는 자신의 귀에 의지하지 않고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수십 번도 더 수정해 갔다.

처음에는 모든 현악기와 팀파니 등 타악기를 첨부해 보기도 하고, 다시 금관 악기를 같이 써보기도 하고, 몇 마디 늘려도 보고 줄여도 보는 등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오늘날 우리가 듣는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41개이고 하이든은 알려진 것만 해도 100개가 넘는 데에 비해 베토벤의 교향곡은 9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9개 교향곡 하나하나가 불세출의 명곡인 것은 마디마디마다 그의 오랜 숙고와 사색이 담긴 결정판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교향곡 9번은 교향곡의 기존 틀을 깨고 마지막 악장에 합창을 도입했다. 실러가 쓴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이 교향곡은 그래서 일명 ‘합창’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13장 ‘기뻐하며 경배하세’는 바로 이 곡에서 따온 것이다.

거장 베토벤은 노년에 그의 거친 일생을 통해 깨달은 기쁨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알리고 싶어했다. 바로 끝까지 참고 견디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도 그것이 지나고 나서는 승리의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진정한 환희요, 기쁨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위 글은 교회신문 <1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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