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리골레토는 어떻게 저주를 받았나
‘클래식과 친해지기’

등록날짜 [ 2016-10-18 11:58:21 ]

멸망할 생각을 집어넣어 망하게 하는 존재 마귀
내 생각보다 말씀과 예수 우선해야 저주 물리쳐



<사진설명>오페라 <리골레토> 중 한 장면.

거장 베르디(1813~1901)가 만든 오페라 중 하나가 <리골레토(Rigoletto)>다. 주인공 ‘리골레토’는 호색한 만토바 공작의 어릿광대 하인이다. 그는 곱사등이 처지를 비관해 세상을 비딱하게 본다. 그의 소일거리는 만토바 공작의 호색 행각을 부추기고 만토바에게 농락당한 사람들을 비웃는 일이다.

어느 날 만토바는 몬테로네 백작의 딸을 유린한다. 리골레토가 그런 몬테로네 백작을 조롱하자 백작은 리골레토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너는 나보다 더한 아비의 아픔을 느끼게 될 거야!”

리골레토는 흠칫한다. 순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 질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리골레토는 자기 딸에게도 만토바가 마수를 뻗칠까 두려워 딸을 새장에 가두듯 숨겨 키운다. 두려움은 현실이 되기 마련. 만토바 공작은 질다에게 접근해 마음을 빼앗고, 리골레토는 이를 막으려 만토바의 실상을 질다에게 폭로하고 함께 시골로 도피한다.

철없는 자식이 그러하듯 질다는 시골에 와서도 만토바를 그리워한다. 만토바는 리골레토와 질다가 은신한 곳까지 찾아온다. 하지만 습관대로 주막에 들러 주인 여자 마달레나도 유혹한다. 그 유명한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을 부르면서….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리골레토와 질다는 가슴이 찢어진다. 이때 흐르는 만토바, 리골레토, 질다, 마달레나의 교차하는 만감을 표현한 사중창이 유명하다.

딸을 지키고자 리골레토는 자객에게 만토바 암살을 의뢰한다. 하지만 이를 엿들은 질다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남자로 변장한 뒤 만토바 대신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른다. 결국 리골레토가 건네받은 시체는 만토바 공작이 아닌 딸 질다였다. 리골레토는 절규한다.

“내가 드디어 저주를 받았구나!”

내 생각인가, 마귀 결박인가
두려움, 염려, 원한이 머릿속에 한번 들어와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속박이다. 리골레토는 들은 저주의 말이 실현되기까지 먼저 두려움에 결박되고, 결국 결박은 현실이 됐다.

생각 속에서 저주로 역사하는 주체는 마귀다. 마귀는 거짓을 생각 속에 넣고 강력한 속박, 즉 강박에 빠지게 해 꼼짝 못 하게 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라는 성경 구절처럼, 마귀는 인간에게 악한 생각을 넣는 존재다. 그 생각을 받아들이다 보면 강력한 결박이 되고 유다처럼 일을 저지른다. 일을 그르치고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마귀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무슨 낯으로 사느냐. 그냥 책임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속이고, 결박하고, 결국 죽여 멸망시키기. 창세 이래 변함없이 마귀가 사용하는 패턴이다. 리골레토는 남을 조롱하는 죄를 지은 후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정말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불행이고 배후는 마귀역사다.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을 넣고, ‘내가 책임져야 해’라는 그럴듯한 인본주의로 마치 구렁이가 온몸을 조여 가듯 스멀스멀 결박해 나간다.

교회 다녀도 강박에 붙들린 사람이 많다. 우울증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심한 열등감이나 대인기피증에 붙들리기도 한다. 또 분노, 화병, 경제적 염려에 항상 사로잡히기도 한다.

“너는 뚱뚱하고 못생겼잖아. 사람들은 네게 관심 없어. 너 같은 게 무슨. 화를 내고 폭발해! 안 그러면 너를 무시할걸? 너는 아픈 게 마땅하지. 이런 집안에서 네가 잘되겠니?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래”

이런 생각들은 단순한 뇌의 자율적인 정신 작용이 아니다. 마귀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결박을 푸는 열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마귀역사와 죄의 결박을 해결하시려고 우리 곁에 육신으로 오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 옛사람은 장사(葬事) 됐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 마귀역사는 죽은 옛사람이 여전히 지금의 ‘나’라고 속이고 멸망할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주가 되려 하심(롬14:9)이요, 우리가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골2:6) 내 느낌, 내 생각을 주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내 생각이라고 속이는 마귀역사와 부정한 생각을 하나님 말씀보다 상전으로 만들어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내 생각의 주인, 느낌과 감정, 몸, 물질과 시간, 모든 것의 주인을 무시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면 된다.

“너는 원래 이렇지” 하고 마귀가 아무리 속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 주인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처음부터 생명을 거셨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대신 죽어 주셔서 사랑을 확증하셨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그러므로 아무리 쓰러져도 주인이신 예수를 굳게 믿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린다.

<함께 듣는 음악>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하세요.


오페라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           오페라 <리골레토> 중 사중창
 (La Donna E Mobile)




/박성진
연세중앙교회 오케스트라
미래에셋증권 상무

위 글은 교회신문 <499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