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 남긴 ‘돌아온 탕자’
‘기독 명화 감상’

등록날짜 [ 2017-04-26 07:54:37 ]


<사진설명> 렘브란트 作 ‘돌아온 탕자’(205.1×264.2 cm).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자신 몫의 재산을 미리 받아 멀리 떠난다.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은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이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애롭고 감동적이며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속죄의 사랑이 느껴진다.


오른손과 왼손 의미 달리하며 하나님의 사랑 전달해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년)가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그림 ‘돌아온 탕자’(캔버스에 유화, 205.1×264.2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는 이미 많은 사람의 눈과 입을 거쳐 세기의 명화로 알려진 지 오래다. 하지만 명화의 한 점으로 보고 무심코 지나치기엔 그 속에 담긴 은혜가 너무나 풍성하다. 자세히 알고 보면 새롭고 더 큰 의미를 느낄 수 있기에 이번 기회에 ‘돌아온 탕자’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가 모티브
‘돌아온 탕자’는 누가복음 15장 11~32절 말씀을 모티브로 그렸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연명하다가 결국 아버지께 돌아온 아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며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잔치하자고 명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잔치나, 탕자처럼 방종하게 살면 어떤 파국을 맞는지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를 떠날 때의 화려했던 옷은 낡았고, 멋지고 탐스러웠을 머리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아들이 아버지 앞에 죄를 뉘우치며 무릎 꿇은 채로 울고 있고, 그를 따스하게 안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모습에 자비와 용서 담아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아버지의 눈이다. 자세히 보면 아버지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매일 아들이 돌아올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시력을 잃은 아버지는 눈이 멀기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하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아버지의 손이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일 인물임에도 왼손과 오른손의 모양이 현저하게 다르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왼손은 강인한 남성의 손을, 오른손은 작고 고운 여인의 손을 그려 아버지의 강인함과 어머니의 온화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왼손은 아들의 등과 어깨를 굳게 감싸고 있으나 오른손은 부드럽게 아들의 등에 얹혀 있다. 즉 탕자를 향한 사랑에는 아버지의 강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드러움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탕자의 어깨에 올려놓은 아버지의 두 손에 렘브란트의 모든 빛이 모여 있고 다른 목격자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다. 이 손안에 자비와 화해, 용서, 치유가 담겨 있는 것이다.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죄를 뉘우치며 우는 아들의 모습은 우리와 닮았다. 또 이런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애롭고 감동적이며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속죄의 사랑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탕자의 머리다. 죄수처럼 삭발한 아들의 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뉘우치는 모습을 표현한다.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 죄를 자복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으며 그때 하나님은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따스함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치유해 주신다는 것을 이 그림을 보며 새삼 느낄 수 있다. 우리 교회 목양센터 로비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문준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2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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