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위한 삶

등록날짜 [ 2004-12-24 17:34:35 ]

만약 누군가 태어난 목적이 죽기 위해서 라면 그것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삶은 시작부터 죽음을 위한 것이었다. 말구유에서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어린양처럼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이었기에 그의 삶은 항상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십자가형이라는 최후의 죽음을 바로 앞에 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는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앞으로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 고뇌와 슬픔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온 몸을 내던져 절규를 품어내는 기도를 마친 후에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예수의 죽음을 향한 계획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자신의 제자의 밀고에 의해 팔려 끌려가게 되었고 극형인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멸시와 천대의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가야 했고, 저주의 형틀에 거대한 쇠못으로 손발이 박혀 나무에 달린 채 육신의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감당해야만 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죽음을 앞둔 자로서의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다 이루었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기까지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또한 연약한 육신을 입은 한 인간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처참한 죽음. 이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고난과 죽음이 없는 그분의 삶은 무의미하다.
예수의 탄생을 앞두고 세상은 목적 없는 즐거움으로 들떠있다. 성탄은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사정없이 난도질 당하고, 인본주의에 그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맞이해야 할 성탄은 목적 없는 기쁨이 아닌 목숨을 건 사랑 앞에 진실된 신앙고백과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진실한 감사의 고백의 함성이 찬양으로 터져 나와야 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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