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영어에 관한 단상(斷想)

등록날짜 [ 2012-05-08 15:02:09 ]

온 나라가 영어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외국과 무역하거나 외국 회사에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대외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모두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헤아리기 어려운 돈과 시간, 에너지를 들이고도 전 국민의 영어 구사 수준은 간단한 대화 수준에 그치고, 이마저도 조금이라도 능숙하게 하면 주변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한국인의 영어 실력은 형편이 없다.

개인적으로도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10년 넘게 공부하고 토익과 토플, GRE 시험에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아 보았지만 한국말처럼 영어로 내 생각을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펼쳐내지 못한다. 간단한 업무와 일상사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복잡한 논리와 생각을 빠른 속도로 정교하게 펼쳐내라면 한국어 대비 10%도 못하는 듯하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라는데 영어로 말할 때 나는 마치 초등학생이 된 듯한 비참한 착각에 빠진다. 비단 필자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스트레스다.

1년 전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던 분이 한국 대학에 교수로 갔다. 이분의 귀국 사유는 영어 스트레스였다. 십여 년 전 미국에 유학을 와 박사학위까지 받고 여러 해를 미국인과 부대끼며 일해왔지만 영어 구사력에 한계를 절감하며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고 한국행을 감행했다.

또 미국에서 직장을 십 년 넘게 다니는 어느 분은 날마다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영어로 의사소통은 자유롭지만 업무상 문제가 생겨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영어로 자기를 방어하는 능력이 미국인만큼 되지 않으니 불이익과 오해를 받을 때가 많아 늘 불안감을 안고 출근한다. 이분들의 영어 실력은? 일반 한국인 기준에서 볼 때 탁월하다. 미국인 기준으로 볼 때는? 부족하다.

그러면 원어민처럼 혹은 원어민에 근접하게 영어를 구사하려면 어떤 길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내린 답은 어릴 때부터 최소한 매일 6~7 시간 정도는 영어에 노출해 영어로 수업을 듣고 말하고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내며 토론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적어도 초중고 과정과 대학까지 나오면 우리가 막연히 바라는 수준이 될 듯싶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또 어릴 때부터 미국에 살며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그 때는 거의 미국인이 되어 한국인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자칫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게 될 수 있으며, 영어 하나 잘해보자고 했다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평생 어정쩡한 정체성을 지니고 소외감에 사로잡혀 살지도 모른다. 한국말을 못하는 아이와 영어를 못하는 부모 사이의 비극은 이민 사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예전 한국이 모든 면에서 미국에 뒤떨어져 있을 때, ‘천국 다음 미국’이라고 하던 시절에는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만 잘해도 부러움을 샀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상대적 퇴보와 한국의 발전이라는 시대상 변화는 영어에 관한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영어가 중요하고 배워야 하는 언어지만, 과거처럼 만능이 아닌 시대에서 영어와 더불어 한국어 구사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면 영어 교육의 끝은 어디일까? 한국에 살면서 원어민 수준은 대부분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이고 설령 근접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거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영어에만 매달리는 사람, 혹은 외국인 학교에 다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시간에 다른 전문분야를 개척하면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처사다.

전문분야에서 늘 외국인을 상대하거나 국제 학술 세미나 등에서 영어로 토론과 발표를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외국 유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여행을 하기 위해, 또 간단한 전화나 물건 사고팔기를 위한 것 등등이라면 이제는 한국사회가 영어에 대해 냉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영어공부를 하고, 대학에서는 영문과를 다녔으며, 입시 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해보고, 미국에서 2년 정도 지낸 뒤에 두서없이 정리해본 영어에 대한 단상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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