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악이 되풀이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등록날짜 [ 2014-06-17 09:15:13 ]

언제부턴가 너무도 쉽게 타협하려는 경향이 짙어져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결코 용납하지 말고 버려야

인간은 끔찍한 범죄나 세월호 사건 같은 외상적 참사를 겪으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다시 삶을 계속하기 위해 애를 쓴다. 세월이 약이라고, 참혹한 경험을 했더라도 차츰 그것에서 벗어나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끔찍한 경험이 집단적인 것이면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나름의 교훈을 얻으려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상처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용서를 많이 얘기한다. 다시 말해 용서는 하되 절대 잊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상처를 빨리 봉합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응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 일제 36년 온갖 수탈과 억압을 받은 우리 민족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이와 비슷하다. 지금의 일본 국민에게 선조의 책임을 묻거나 계속해서 심판을 주장하는 대신, 과거의 악행을 단지 역사의 기억으로만 남기고 현재의 일본인들과는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빨리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생산적인 관계를 만들자고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면서….

하지만 용서는 하되 잊지 않겠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잊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보면 그와 연관된 과거의 잘못을 은연중 상기할 때만 가능한데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본처럼 과거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정신대나 강제 징용자의 한 맺힌 절규와 피해보상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고약한 이웃을 대할 때 우리는 과연 화해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내가 품으려 할 때도 용서는 하면서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기억 때문에 다시 그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나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 실은 과거를 철저히 잊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쉽게 용서를 말하는 것은 절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악이나 실수에 대해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유독 온정주의가 만연한 풍토에서 용서를 너무도 쉽게 권장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고작 4년간 독일의 점령을 받았지만 전후 12만 명이 넘는 나치 부역자를 처형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비극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것보다는 해방 이후 친일잔재의 청산과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에서도 이런 관행이 되풀이되면서 너무나 쉽게 범죄나 악에 대해 타협하거나 비리를 봐주는 경향이 생겼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공직자들이 성추행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공직에 복직하는 일도 많고, 심지어는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선거에 당당하게 나가 당선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다 보니 부조리와 잘못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으로 국민은 많은 슬픔을 느꼈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참사를 유발한 온갖 부조리와 협착세력에 대해 분노하였지만 벌써 그런 비리에 눈을 감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구조적 비리가 많은데도 유병언 일가에게만 책임을 물으면서 이런 인재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구조적 노력을 슬그머니 중단하려고 하니 말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주된 이유는 우리가 쉽게 분노하는 만큼 쉽게 용서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고치기보다는 쉽게 망각과 관성에 몸을 맡기면서 현실로 돌아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 거꾸로 과거의 참사와 기억을 빨리 잊되 오히려 그런 악에 대해서는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89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