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우리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려는 용기와 노력이 중요해

등록날짜 [ 2014-12-30 14:55:00 ]

요즘 회자하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의 항공 노선(뉴욕-인천)과 동일 시간대 항공기를 석달 전에 타 보았습니다. 이번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 뉴스를 통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만,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발단은 해당 항공사 내 SNS망에 누군가가 올린 글을 본 직원들이 인터넷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이라고 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보장된 우리나라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광범위한 보급에 힘입어 이런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확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확한 사실은 해당 기관의 조사로 밝혀지겠지만,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SNS를 통한 이런 표현의 자유는 인류 사회에 한 획을 긋는 일들을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이런 자유를 악용해서 헌법에 명시한 국가안보를 무너뜨리려는 표현마저도 허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반면, 거짓이 아닌 진실과 정의에 대한 표현 자유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므로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미국의 한 영화사가 북한공산집단 독재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개봉할지 말지를 주저하다가 극적으로 개봉하기로 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자 영화사는 결정을 번복해 개봉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될지 궁금합니다. 영화의 완성도나 배우의 연기력은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줄거리 자체가 현재 북한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기에 북한도 테러 위협까지 해 가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간단체들이 휴전선 근방에서 대북 삐라를 살포해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합니다. 북한이 이 일에도 똑같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들은 진실이 알려지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영화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 독재자가 진실과 정의를 인정하여 예수 믿고 회개하여 천국 가는 해피엔딩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북한의 수많은 우리 동포가 복음을 만나고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의 신앙 간증이 퍼져 나가 전 세계 모든 우상숭배를 하는 종교를 가진 자들을 예수 복음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북한 동포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런 심정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표현한 공직자가 있습니다. 지난 12월 23일 뉴욕에서 특별히 소집된 UN 안보리 회의 때 북한 인권이 공식 안건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이사국의 투표 결과 북한 인권상황이 UN안보리의 정식 안건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오준 UN주재 한국대사가 각국 대표의 발언 순서 마지막 차례에 원고를 읽어가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무겁다. 대한민국 국민에겐 북한은 그저 아무나(anybodies)가 아니다.” 또 오준 대사는 이산가족을 언급하면서 “비록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겨우 수백 km 떨어진 곳에 우리 동포가 있다는 걸 안다”라고 하면서 가슴 깊이 호소하였고 이 회의가 끝난 뒤 각국 대표단은 오준 대사에게 포옹을 청하고, UN 주재 미국대사는 오 대사에게 “내가 지금까지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들은 모든 발언 중 가장 강력했다”는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국민이나 모든 분야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아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극장가에서는 6.25사변 때 흥남부두 철수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된 어느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수백만 명이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주인공은 성실한 아버지가 되어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서독에 광부로 파견을 가고 월남에 가서 돈을 벌며 열심히 살아 간 이야기라는데 저의 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를 같이 느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자유를 단지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지키려는 용기와 노력입니다.

/ 강승호 안수집사

국방부 근무

 

위 글은 교회신문 <4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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