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 기획칼럼] 국민의 눈물로 태어난 구국의 배 ‘백두산함’

등록날짜 [ 2025-07-01 23:19:12 ]

대한민국 첫 전투함 ‘백두산함’

6·25전쟁이 발발한 첫날 밤에

부산 침투하는 북한함 침몰시켜

피 흘려 지킨 역사를 기억하며

나라 보전 호국 정신 이어 가야


칠흑 같은 어둠이 대한해협을 뒤덮은 1950년 6월 25일 밤. 38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발생하던 개전 첫날의 그 밤에, 1000톤급 무장수송선 한 척이 부산을 향해 은밀히 남하하고 있었다. 그 배에는 북한군 제766독립보병연대와 제945육전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600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명확했다. 부산항을 기습 점거하여 유엔군의 상륙을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여 대한민국을 조기에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이 부산에 상륙했다면! 당시 부산은 유일한 군수물자 하역 항구였고, 며칠 후 미군 스미스 부대를 비롯한 유엔 16국 소속 연인원 100만 명이 들어온 요충지였다. 부산을 빼앗기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 검은 파도를 가르며 나타난 작은 전투함 한 척이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이었다.


바다를 향한 집념, 손원일 제독의 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짓밟힌 것은 이순신 장군처럼 바다를 지키는 자가 없어서 그렇다.”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가 아들 손원일에게 남긴 이 한 마디는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씨앗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는 만주에서 선교활동 중 일본 경찰에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살길은 바다에 있으니 바다를 지키는 방법을 배우라”라는 유훈에 따라 아들 손원일은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진학했고, 22세에 중국해군부 시험에 합격해 해군보관이 되었다. 이후 세계를 항해하던 중에 받은 부친의 부고 소식은 그의 가슴에 더 깊은 사명감을 새겼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그리고 해군 장교로서 언젠가 해방된 조국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은 그의 삶을 지배했다.


해방 후 귀국한 손원일은 안동교회 지하실에서 ‘해사대’를 조직하며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첫발을 내디뎠다. 미군정을 설득해 해안경비대 창설 허가를 받아내고, 1948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변한 전투함 한 척이 없었다. 노후한 상륙정과 일본군이 버리고 간 소해정이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함포를 장착한 군함 한 척도 없는 제독이라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전투함 구매를 요청했지만,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은 군함 한 척을 마련할 재정도 없었다.


눈물로 모은 6만 달러, 기적의 탄생

그때 손원일 제독이 내린 결단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1949년 6월, ‘함정건조갹출위원회’를 구성하여 해군 장병을 대상으로 성금 모금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장교 월급이 쌀 한 말 값도 안 되었어요. 그런데도 대포 달린 군함을 사자며 월급의 10%를 공제했을 때 불만을 품은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6·25 참전용사인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증언처럼, 군함 마련을 위해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를 기꺼이 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고철을 주워 팔고, 양복 수선비를 아꼈다. 해군 부인회는 바느질품팔이를 하고, 소꼬리곰탕을 만들어 팔았다. 손원일 제독의 아내 홍은혜 여사를 비롯한 부인회의 헌신도 눈물겨웠다.


4개월 만에 모인 1만 5000달러. 이승만 대통령도 감동하여 국고에서 4만 5000달러를 보탰다. 총 6만 달러를 들고 손원일 제독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녹슬고 낡아 2~3년간 방치된 중고 구잠함 USS PC-823을 1만 8000달러에 구매했다.


인수요원 15명은 모두 장교였지만, 그들은 작업복을 입고 녹을 긁어내고 페인트칠을 했다. 배에서 먹고 자며 밤낮없이 수리에 매달렸다. 하와이에서 3인치 주포를 장착하고, 괌에서 포탄 100발을 구입할 때는 현지 교민들이 김치를 담가 와서 전해 주며 격려했다.


1950년 4월 10일, 마침내 백두산함이 진해항에 입항했다. 국민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강철로 응집된 순간이었다.




<사진설명>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 당시 손원일 제독과 해군 그리고 해군 가족들이 모금해 구입한 배이다.



운명의 밤, 개전 첫 승리 거둔 전과

그리고 겨우 두 달 후인 6월 25일 밤. 백두산함은 부산 오륙도 남동방에서 정체불명의 선박을 발견했다. 국제신호로 신원 확인을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었고, 갑판에는 북한군 복장의 무장병력이 가득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당시 백두산함의 최용남 함장은 충무공의 정신을 되새기며 승조원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승조원이다. 오늘 밤 두려움 없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이 바다에서 죽을 것이다.” 이어 최 함장은 “전투 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명령했다.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였다.


자정을 넘어 시작된 포격전. 백두산함은 3인치 주포 한 문에서 포탄 100발로 3배나 큰 적선과 맞섰다. 북한군 무장선박이 워낙 크고 단단하여 약점(바이탈 파트)을 정확히 노려 사격할 목적으로 피해를 무릅쓰고 지근거리(약 400미터)까지 배를 갖다 붙였다. 


열악한 재정 탓에 실사격 훈련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에 사격 경험이 전무한 포술요원들, 거친 파도와 칠흑 같은 어둠. 모든 것이 불리했다.


“적함은 어찌 되었습니까? 끝까지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흉부에 적탄을 맞은 김창학 조타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타기를 놓지 않았다. 전병익 장전수도 포탄 파편에 가슴을 다쳤는데도 “우리가 이겼어! 이겼다고!”를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1시간 반의 치열한 사투 끝에, 1950년 6월 26일 새벽 1시 38분. 북한군 600명을 태운 무장수송선은 마침내 대한해협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만약 북한 특수부대 600명이 부산에 상륙했다면, 이후 전개된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부산항이 막혀 7월 1일 미군 스미스 부대도, 105mm 박격포 10만 발도, 유엔 16국의 지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6·25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의미 있는 승전이었다. 연일 밀리던 육상 전선에서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었다. 무엇보다 국민의 성금으로 만든 배가 나라를 구했다는 사실은, 자주국방 의지의 상징이자 국민적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다.


기억해야 할 백두산함의 정신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해군력을 보유한 해양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께서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셨고,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손정도의 아들을 통해 기적을 이루셨음을.


위기의 순간 하나 되어 조국을 지키겠다는 국민의 의지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군인정신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지도자의 혜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다. 포탄 100발로 적 600명을 막아 낸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최용남 함장이 외친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백두산함의 영웅들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걸고 지켜 내야 할 소명이 있다.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 속에 잠든 북한군 600명과 백두산함에서 산화한 김창학, 전병익 용사. 그들 모두는 분단의 비극이 낳은 희생자이다. 언젠가 북한 동포들도 해방을 맞고 자유를 누리는 날이 오기를, 한반도에 하나님의 평화가 온전히 임하여 백두산함의 포성이 다시는 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백두산함의 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국민의 헌신과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를 지켜 낸 피 흘린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손정도 목사의 기도가 아들을 통해 응답 받았듯이, 우리의 기도와 행동도 다음 세대를 통해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을 믿으며.



<사진설명> 6·25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20일 진해 제2부두에서 찍은 백두산함 승조원 기념 사진.


위 글은 교회신문 <906호> 기사입니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이 기자의 다른 뉴스 보기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