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이 가을, 당신은 괜찮은가요

등록날짜 [ 2015-11-10 16:51:34 ]

이제야 거실 가득 햇살이 비친다. 여름내 잘라 버려야 할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나무가 잎이 듬성듬성해져 빛이 넉넉해졌다. 10여 미터는 됨 직한 나무가 제 키만큼 가지를 뻗고 촘촘히 잎을 내어 올여름 빨래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그만큼 드리워 준 그늘로 시원하기도 했건만 왜 나쁜 기억이 먼저 그리고 진하게 새겨지는 걸까. 감사에 인색한 내 모습인 것만 같다.

 

이 가을, 잎들은 발그스름하거나 노르께해져서 부지불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 여운이 무심히 떨어져 나부끼는 낙엽과 사뭇 다르다. 가지에 간신히 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 비행하는 모습에 묘한 울림이 있다. 거실 가득 드리운 그림자로 좀 더 천천히, 한 번 더 떨어진다. 그러곤 ‘찌르르’ 명치께를 훑고야 만다.

 

쏜살같이 날아가는 새들, 바람의 장난질에 ‘우우우’ 몸을 떠는 나무들, 구름과 해의 술래잡기에 어지러운 빛의 산란과 농담 섞인 그림자로 거실은 온종일 자연의 캔버스가 된다. 뒤쪽 나무에는 청설모가 부지런히 오르내리더니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얇아진 달력을 넘기다 올해가 며칠 남았는지 헤아려 보았다. 60일! 식구들 생일은 지나고 내 생일만 남았네. 아, 예수님 생일도 있구나. 그 밖에 별다른 집안 대소사가 없다. 아니, 시아버님 기일이 있었지. 순간 심장이 쫄깃해진다. ‘긴장해야 해! 이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났구나’ 하는데 “엄마, 벌써 월요일이야.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고등학생인 막내 녀석이 한다는 말이다.

 

흐흐, 네가 세월의 속도를 그렇게 느낀다니, 엄만 어떻겠냐. 눈 감았다가 뜨면 하루가 간다. 왜지? 내가 10대 때는 세월아 네월아 엉덩이를 걷어차도 늦장만 부리는 세월이 참 많이 원망스러웠는데. 이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현대 문명의 이기인가. 아들아, 그러니 온종일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운동만 하지 말고 좀, 잘 살자!

 

마음씨 착한 아이는 말할 때마다 입에서 꽃과 보석이 쏟아지고 심술궂은 아이가 말할 때는 뱀이나 지렁이 같은 징그럽고 무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동화가 떠오른다. 좋은 말, 예쁜 말을 해야지, 마음먹었다. 그 생각이 커져 말쟁이가 되지 않길 바랐다. 더군다나 글쟁이를 경계함이랴.

 

혹자는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재능이냐며 추어올린다. 그 말은 자기감정을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대로 꾸밀 수 있다는 얘기다. 일 년 전 뱉은 말이 지금 발목을 잡는다. 약속을 중하게 여겨온 터라 고민이 깊었다.

 

손바닥 뒤집듯 싸하게 변해 버린 마음을 뒤로한 채 단지 약속에 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어렵게 결론을 내렸다.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나, 더구나 신앙에서는 하나님과 나, 일대일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리라. 새삼 모든 관계의 거리와 깊이를 돌아본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다하는 용기,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요즘은.

 

흡사 별장 같은 곳에서 호사를 누린다. 이곳에서 여름과 장마를 그리고 가을을 보낸다. 직박구리가 깡패처럼 내지르는 소리가 아직 거슬리지만 이름도 모르는 빛깔 곱고 예쁜 새들이 찾아들어 좋다. 새가 많다는 것은 곧 곤충이 많다는 것. 그중에는 해충도 많다. 돈벌레, 지네, 모기부터 촘촘한 방충망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들까지, 크기도 종류도 다양하다.

 

어쩌나, 더불어 사는 수밖에. 그런데도 저, 저, 까치 한 쌍이 ‘나 잡아 봐라’ 하고 까불며 내지르는 소리에 긴 막대기라도 휘둘러 때려 주고 싶은 맘이 가득한 까닭은 여전히 내 심사가 편치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대, 이 가을, 부디 편안하길.

정성남 집사

위 글은 교회신문 <4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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