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진실로 사는 사람들

등록날짜 [ 2009-06-30 14:05:17 ]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캐릭터는 참으로 독특하다. 몇 해 전 미국 TV에서 그를 희화(戱畵)한 만화영화를 보았는데 그가 우쭐댈 때마다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최근 북한은 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목숨을 담보로 세과시하는 것은 비극이요, 북한 주민의 참담한 빈곤도 비극이지만, 희비를 구분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니 말해 무엇 하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서로의 입장이고, ‘저마다의 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마다의 진실’ 때문에 전쟁을 한다. 영국시인 루퍼트 부룩(Rupert Brooke)은 1차 대전 때 아름다운 애국시 ‘병정’(The soldier)을 남기고 전사했다. “내가 죽는다면 이것만은 기억해주오/이국 땅 들판 어느 한 곳에/영원히 영국인 것이 있다는 것을/(생략)” 이 시(詩)로 수많은 영국의 어린 병사들이 전쟁터로 몰려갔다. 서로의 애국심이 아우성치며 충돌하는 이 땅은 이제 핵전쟁의 먹구름이 가득하다.
‘저마다의 진실’ 때문에 싸우고, 죄 짓고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도 자기의 입장을 몰라주는 세상을 원망한다. 무더운 여름 밤, 비좁은 감옥에 저마다의 진실들이 모로 누워 잠을 청할 때, 옆 사람의 존재는 그저 나를 힘들게 하는 36.5도의 열기라고 어느 무기수가 고백했다.
‘저마다의 진실’에 송두리째 갉아 먹힌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도, 로마의 황제 네로도,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도 온몸이 다 갉아 먹히도록 ‘저마다의 진실’을 놓지 못했다. 황제 네로는 초기에는 “신이 주신 소명”이라며 로마의 문화를 아름답게 부흥시켰으나 갈수록 그에게 참견하는 누구도 용납하지 못했다. 이복동생을 살해하였고, 친어머니와 아내까지 살해했으며, 로마의 대형화재 때는 민심수습을 위해 기독교인을 무섭게 핍박하였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 살며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의존하여 풍요를 누렸다. 사단이 ‘저마다의 진실’로 속이기 전까지는. 인간이 자존자(自存者)가 되어 불순종의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사라지고, 전쟁, 아우성, 고집, 고립, 그리고 눈물과 수고뿐인 철장에 갇히게 되었다. 사단에게 속은 것이다. 저마다의 진실이란 교만이었고 죄였고 사망이었다. 죄 없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픈 마음으로 예수가 오셨다. 예수의 피로 되찾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주님은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 명하셨다.
내가 주님 모르고 살았던 긴 세월을 돌아보면 한 편의 애잔한 무성영화 같다.
채플린의 허둥대는 몸짓과 쓸쓸한 표정이 겹쳐진다. 번잡한 거리에 어깨를 부딪기며 밀려가는 사람들. 철장 없는 거리에서 자유를 외치며 활보하는 그들도 ‘저마다의 진실’에 속아 서로를 힘들어 하지는 않나 생각한다.
북한은 도움을 받고도 감사를 모른 채 도리어 미사일을 쏘며 뒷골목 깡패 기싸움하듯 으스댄다.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세계가 곤혹스러워하는 상황을 보며 부끄러운 내 모습을 생각한다. 믿노라 하면서도 ‘나만의 진실’이 파고들면, 감사도 회개도 잊고, 주님 우선(God first)도 잊은 채 사랑과 축복만 간구하는 나는 과연 주님이 상대할 만한 수준일까.
세상은 안팎으로 어두운 광야이다. 검은 마귀에게 눈과 귀 가린 자들이 저마다 진실이라고 아우성치고, 핵전쟁의 먹구름까지 가득하다. 예수님은 피 흘려 나의 죄를 해결하셨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위 글은 교회신문 <16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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