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전파해야 할 사랑
사랑에 관한 인문학 고찰 ①

등록날짜 [ 2014-03-24 17:02:23 ]

사도 바울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보다 사랑임을 강조
고린도 지방 당시에 유행한 사고들 살펴볼 의미 있어

고린도전서 13장은 신자는 물론 일반인도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그 내용이 친숙하다. 특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13:13)는 마지막 구절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처럼 절절히 ‘사랑’에 관해 말하며 그것이 최고라고 말했을까?
 
물론 일찍이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고 요약한 바 있기에 바울이 그것을 되풀이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고린도교회에 분열과 갈등이 너무 심해 이를 권면하려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 지방에서 횡횡한 육욕적 사랑을 경계하고 사랑이 지니는 진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랑하면 남녀의 성애를 떠올리지만, 사실 사랑은 훨씬 복잡하고 풍부하며 내용도 다 다르다.

그리스어로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스’, 친구들 간의 우정은 ‘필리아’라 부른다. 부모 자식 간의 육친적 사랑은 ‘스트로게’다. 하지만 바울이 진짜 강조하고 싶은 사랑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리스도 공동체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사랑인 ‘아가페’였다. 이러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전파해야 할 사랑인 아가페에 관해 알아보자.

사랑의 도시(?) 고린도
코린토스라는 지명으로 알려진 고린도 지방은 아테네 서쪽 80km 정도에 있으며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 로마 제국 당시 크게 번성했다. 바울은 이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우지만, 이 지방이 워낙 퇴폐적이고 미신숭배가 많아서 교회를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고린도 지방은 항구도시로 로마제국과 소아시아로 가는 배들이 집결하는 중간 거점으로 크게 번창했는데 이 때문에 음행과 매춘이 많았다. 그리스 신 중에서 사랑과 미를 대표하는 여신이 아프로디테(비너스)인데 바로 고린도 지방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이 신을 모시는 신당에서 1000여 명이 넘는 신전 매춘부가 종교를 빙자해 성매매를 했다.
 
당시 고린도 지방은 매춘과 향락의 도시로 국제적인 이름을 날리며 여행객들을 유혹했다. 이런 환경 탓인지 바울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고6:15)라고 책망할 만큼 음행과 근친상간 같은 타락이 교회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것은 성애적 ‘에로스’가 당시 그리스인과 그 문화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널리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 사랑을 가르친 점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가 쉽다.

하나가 되려는 욕망, 에로스
철학자 플라톤은 『향연』에서 최초의 사랑인 에로스에 관해 말한다. 에로스는 부유의 신 포로스와 빈곤의 신 페니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자꾸 베풀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항상 채울 수 없는 결핍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낀다. 또 에로스는 선과 완전을 갈망하는 힘이지만 육체적 성욕도 포함하기에 향락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에로스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 큰 욕망이 생기며 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 희열을 누리려는 욕망을 불 지피는 동력이기도 한데 이것을 플라톤은 양성인간 신화를 통해 설명한다. 『향연』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룬 양성이었는데 인간의 힘을 두려워한 신이 이 자웅동체를 반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애타게 찾게 되었으며 반쪽을 찾으면 서로 결합해 한 몸을 이루려고 했다. 이 신화는 에로스가 자신이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 완전함을 이루려는 통합의 열정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에로스는 상대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고 위해 주기보다는 자신의 욕구 해소 대상처럼 생각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에로스 사랑의 기초에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하다 채울 수 없는 환상에 매달리는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고 비판하였다. 에로스 사랑에 매달리다 보면 결국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육욕은 채우려 하면 할수록 더 부족함을 느끼게 하기에 나중에는 향락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과도한 성욕을 탐구하다 보면 사랑이 아니라 쾌락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데 당시 고린도 사람들이 그랬다.

성숙한 사람들의 우정, 필리아
에로스가 서로 하나가 되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열망이라면, 필리아는 성숙한 사람들이 나누는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시 공동체 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인 ‘필리아’를 찬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로 자신에게 있는 고유한 덕을 갈고닦아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덕이 충만하게 실현된 상태를 선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내가 어부라면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도록 덕을 연마할 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올바로 덕을 기르려면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과 친애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혼자 힘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실현될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을 묶어 주고 서로 덕을 나눌 수 있게 도와주는 힘이 바로 필리아, 우정이다. 필리아는 공동체를 유지해 줄 뿐 아니라 좋은 사람들끼리 덕을 나누며 서로 이롭게 하는 중용의 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필리아도 행복을 위해서 공동체 속에서 친구와 덕을 나누어야 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처럼 통합을 강조한다. 하지만 필리아는 어느 정도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개인적이고 한계가 많다. 필리아가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에게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베푸는 그런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7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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