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포커스] 구원의 한 방향만 주장하는 단체
구원파 (1)

등록날짜 [ 2012-05-08 15:00:53 ]

‘거듭남’에만 초점, 성도의 ‘성화’는 무시
결국 ‘회개’는 없고 죄에 대한 책임 회피

소위 구원파로 알려진 단체는 크게 세 계열로 나뉜다. 권신찬(사망)-유병언 계열, 이요한 계열, 박옥수 계열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교회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공식 규정됐다.

권신찬-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은 서울 삼각지에 있는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에 10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수시로 성경강연집회를 개최한다.

이요한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은 경기도 인덕원 사거리에 있는 서울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지역에 25개 지부 모임, 지방 10여 곳에 지부 교회를 두고 있다. ‘성경강연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개최해 이요한(본명 이복칠)이 말한 구원파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박옥수 계열(기쁜소식선교회)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기쁜소식강남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에 200여 지부를 두고 있다. 이들 지부 이름은 대체로 ‘기쁜소식OO교회’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원파 단체 중 가장 교세가 큰 편이다. 관련 단체로는 기쁜소식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 참고 IVF가 아님), 링컨학교(대안학교), 그라시아합창단 등이 있다.

구원파는 어떤 곳인가
구원파는 사회적으로 대변혁기인 196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외국인(딕욕, 길기수 등)에게 교리를 전수 받은 한국인들이 국내에 뿌리를 내렸다.

구원파 교리를 전수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공통으로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당시 기성교회 안에는 복음이 없고 구원받은 목회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으로 제자들을 양성했다.

위에 말한 권신찬,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씨는 처음에는 같은 노선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68년 박옥수 씨가 결별해 독자 노선을 걸었고, 1983년 이요한 씨도 이탈했다. 권신찬-유병언 씨는 장인과 사위 관계로 함께했다.

초기 구원파 신도는 ‘10단계 질문서’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등 질문을 던지며 정통교회 성도에게 접근한다. 질문에 한두 번 응답해 주다 보면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등 구원파 핵심 교리를 드러낸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크게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즉각적인 구원’과 ‘점진적인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한 마음으로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다. 물론 이때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가 당연히 따라온다. 이것이 즉각적인 구원이다. ‘칭의(稱義)’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칭의’, 즉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생활이 순식간에 다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후패한 옛사람의 구습을 없애고 거룩한 새사람이 되려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싸움이 날마다 계속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싸움과 관련해 말씀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고전15:31). 성경은 성도가 걷는 이 거룩해지는 과정을 점진적인 구원 또는 현재 진행형적인 구원, 그리고 ‘성화(聖化)’라고 부른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성화’ 단계를 무시한다.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
구원파는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으로’라는 말과 ‘깨달음’이 같은 의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의미로 가르친다.


<사진설명> 구원파 중 대표격인 박옥수 성경세미나 광고. 박옥수 씨는 매년 성경세미나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홍보를 감행하고 있다.

권신찬 씨가 ‘죄 사함을 깨닫고’, 유병언 씨가 ‘복음을 깨닫고’, 이요한 씨가 ‘중생을 경험하고’, 박옥수 씨가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그 구원받은 시각(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며, 육적 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영적 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구원파 측은 영적인 생일을 모른다고 해서 꼭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구원받은 날(영적 생일)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구원파식 구원은 반드시 자신이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육적 생일을 알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은 자기 스스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육적인 생일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훗날 부모나 주변 어른에게서 들어서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달력을 보고 안 사람이 있을까? 따라서 육적 생일을 아는 것처럼 영적인 생일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므로 구원파 신도가 어떤 성도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칠 때 이렇게 대답을 하면 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위 글은 교회신문 <2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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