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현장을 찾아서(13)] 강화지역 선교에 모체가 된 교회
강화 교산교회

등록날짜 [ 2013-11-05 11:38:02 ]

올해 창립 120주년… 옛 성전 모습도 그대로 보존
가정교회 하나가 현재 170여 교회의 겨자씨가 돼


<사진설명> 교산교회 옛 건물과 현재 건물.

우리나라에서 강화도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고장도 드물다. 이곳은 섬이라는 입지조건 때문에도 애환 얽힌 사건들이 분분한 곳이다. 많은 사람이 섬을 둘러싼 바다와 갯벌, 산 같은 아름다운 경치에 이끌려 이곳을 찾지만, 기독교인에게 강화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게 남을 신앙의 섬으로 자리 잡고 있다.

1893년에 세워져 강화지역을 비롯해 교동도 등 인근 섬에 교회를 세우는 데 모(母)교회 역할을 한 강화 교산교회가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강화 모교회로 유명해지자 교산교회에는 탐방객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가 위치한 교산마을은 강화도 서북단 최전방 지역이다.

120년 역사를 안고
교산교회는 강화읍에서 고인돌 유적지가 있는 하점면을 거쳐 인화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갈라지는 철산리, 덕산리 방향으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언덕길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고 왼편 양사면 방향으로 약 3㎞ 들어가면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나온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바다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이곳 주민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창립 110주년에 맞추어 건축된 새 예배당은 교회 성도 150여 명이 공사에 직접 참여해 땀을 쏟아 더 큰 의미가 있다.

건물 배치는 40년 전에 건립된 기존 교회 북쪽 대지에 직각으로 배치, 전체가 ㄴ자 모양이 되도록 하여 아늑한 외부공간을 연출하려 했다. 또 타워형 외부계단은 ‘등대’와 ‘횃불’로서 이 교회 상징성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물건으로는 1900년대 초 교적부와 그 무렵 사진, 필사본 성경과 찬송가사집 등 수십 점이 있다. 이 밖에 일제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종 그리고 1960년대 세운 미끄럼틀 같은 시멘트 구조물이 교회 부지 1800여 평에 산재해 있다. 교회 측은 이런 물건들을 최대한 살려 환경친화형 영성 공간으로 살려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교산교회 창립 배경
1892년 미국 감리회 한국선교연회는 인천구역 담임으로 존스 선교사를 임명했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섬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헛수고가 됐다.

이 무렵 내리교회에서 조직한 상조회는 상조계원 50명 중 이승환이라는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 이승환은 강화 서사 출신으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었다.

존슨 목사와 이승환은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 선교를 함께 진행했다. 존스 목사는 전도인 이명숙을 파송하여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4~5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강화에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사진설명> 옛 교회 내부.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 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이렇게 해서 강화 교산교회가 창립하기에 이른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했다.

이승환은 그 후 매서인(성경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 아펜젤러 목사를 통해 권사 직분을 받는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 같은 인근 도서를 돌며 교회를 몇 군데 세운 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화 주변 섬으로 복음 전하는 전초기지
교산교회 김상임(金商壬)이라는 사람은 1848년 강화 양사 출생으로 16세에 이미 동몽과 과거를 보아 상을 받은 준재로 성균관에서도 수학한 바 있고, 40세(1887년)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이름 있는 양반이었다. 김상임은 존슨 선교사의 헌신적인 열의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고,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김상임의 개종은 그의 문중만이 아니라 강화지역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김상임은 강화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하였고 초기 감리교 교역자 양성과정인 신학회를 졸업, 목사안수를 받기 넉 달 전 1902년 4월 별세하였다. 김상임이 살던 집은 지붕만 바뀌었지 집 모양새는 백 년 전 그대로 아직 교회 맞은편 언덕 밑에 남아 있다.

교산교회는 강화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교동섬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70여 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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