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열왕 이야기<11>] 유대와 이스라엘로 나라가 나뉘다
르호보암(2)

등록날짜 [ 2012-05-08 14:58:22 ]

아버지 솔로몬 때 우상숭배로 아들 때까지 영향 끼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결국 멸망으로 치달아

르호보암의 조부 다윗과 아버지 솔로몬은 구약 역사를 대표할 만큼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가장 영광스러운 위치에 올려놓았고, 후손에게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왕은 바로 르호보암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까지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國家)로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또다시 반으로 나누어 놓은 왕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신앙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족속 출신인 나아마라는 여인이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가증한 신이라 부르는 몰렉을 숭배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어주기도 했다(왕상11:5~7;14:21;대하12:13~14). 결국 르호보암의 아버지 솔로몬과 어머니 나아마가 행한 우상숭배는 자연스럽게 자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가 솔로몬을 매우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인식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스라엘 안에 많은 우상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 통치 때에 그 결과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의 열매가 반드시 당대에 결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물이 열매를 맺는 데는 시간이 흘러야 하듯, 영적 열매도 그 결실을 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솔로몬 때에 있었던 우상숭배 결과가 그의 아들 때에 나타난 것처럼,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 열매를 맺는 데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농부가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일들에서 즉시 그 결과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열매는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시간이 걸린다. 열매를 맺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 결과도 드러난다.

르호보암은 결국 통치 5년째 되던 해에 애굽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에 있는 귀중한 재물들을 모두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다(대하12:1~11). 그리고 애굽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된다.

얼마나 죄가 컸으면 르호보암이 통치한 지 불과 5년 만에 이렇게 됐는가 생각할 때, 죄질이 얼마나 악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애굽 왕 시삭의 침입과 약탈, 파괴, 위협과 강탈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징치(懲治)를 의미한다. 유다 왕국의 왕과 백성이 모두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게 했던 것이다. 열왕기상 14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악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또 한 가지 죄악은 르호보암 왕이 여호와께 간구해야 할 때에 그러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해이해져서 악을 행한 사실이다. 마음이 늘 간절히 여호와를 향해야 하는데, 환난을 받을 때만 일시적으로 “통회합니다!” 했다가 환난이 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마음이 해이해져 악을 행하는 식이다.

르호보암 왕은 통치 5년 만에 대재앙을 만났지만, 그 이후의 남은 생애를 보아도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애굽이 침공한 이후 12년간을 더 왕 노릇을 하고 살았는데 그 12년 동안에 회개운동이 일어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비참한 곳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국민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죄를 자복하게 하는 등의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는 말이다.

다만 애굽의 종이 되었을 때 잠깐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눈을 돌린다.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대하12:12)

그나마 그것이 후에도 북쪽 이스라엘과는 달리 르호보암이 통치한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살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을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토록 그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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