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창조와 진화는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 진화 둘 다 관찰과 실험 불가능하기에 과학의 영역 벗어나

등록날짜 [ 2017-12-13 14:34:36 ]



창조는 비과학적이고 진화는 과학적이라는 인식 있지만
사실 둘 다 과학을 벗어난 믿음과 세계관의 문제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지식 함양하고 자녀 양육해야
 
사람은 누구나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고 있다. 그중에 가장 궁금한 것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다. 생명체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지구와 우주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창조일까, 진화일까? 과학자들은 이런 기원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 보려고 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문제는 과학이 기원(起源)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 문제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찰과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 문제를 풀려면 가정(假定)과 이론(理論)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크게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론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가 있다는 전제 아래 그분의 지혜와 설계에 따라 천지 만물이 6일 동안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진화론은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연히 발생(發生)하여 오랜 세월(지구는 45억 년, 우주는 137억 년) 동안 진화 과정을 거쳐 지구와 우주와 생명체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론과 진화론 둘 다 관찰과 실험을 할 수 없기에 과학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따라서 창조론 대(對) 진화론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 또는 세계관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유무에 관한 영적 전쟁으로서 신앙과 신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창조주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바탕으로 하기에 인격적인 믿음이다. 하지만 신념은 이성과 지식만을 바탕으로 하기에 맹목적인 믿음이 된다.

인격적인 믿음은 은혜와 생명을 낳지만, 맹목적인 신념은 상처와 죽음을 낳는다. 진화론은 맹목적인 신념으로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많은 상처와 죽음을 남겼다. 그 상처는 공교육 시간에 배우는, 진화론이라는 잘못된 과학적 지식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에 필자는 이를 ‘지적 상처’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모두가 과학시간에 배우는 진화론을 통해 지적 상처를 입었는데도 누구도 지적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면 치유하려 하지만, 상처 입은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치유하려 들지 않는다. 

<사진설명> 우리는 잘못된 지식인 진화론을 어릴 적부터 교육받아 ‘지적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다. 지적 상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21세기는 첨단 과학 시대이며, 반도체 기술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지식과 정보가 빛의 속도로 왕래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지식과 정보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없다 하고, 하나님이 틀렸으며, 기독교 신앙은 비과학적이라고 조롱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여 교회를 떠나게 하는 지식과 정보들로 넘쳐 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의 자녀가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잘못된 지식을 학교 교육을 통해서 배웠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지식으로 입은 지적 상처는 이성을 마비시키며, 마비된 이성은 신념이라는 방호벽을 쌓아서 참된 지식이 들어올 수 없게 한다. 1859년 다윈이 ‘종(種)의 기원(起源)’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 진화론을 현재 전 세계에서 공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릴 때부터 공교육으로 진화론을 배우기에 우리 모두 지적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다. 지적 상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한윤봉 교수 
전북대학교, 세계 100대 과학자
한국창조과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5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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