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87] 힘에 지난 절망에서 주만 바라며
ὑπέρ δύναμις (우퍼 뒤나미스)

등록날짜 [ 2021-06-25 14:15:17 ]

마귀는 너무나 간교하고 사람은 질그릇처럼 연약해 위대한 일을 해낸 후에도 어이없이 무너지게 한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다’며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갈멜산에서 이적을 나타냈던 엘리야는 왕비 이세벨의 협박에 무너졌고,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난 요나는 한나절 뙤약볕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기도했다. 자신이 제물임을 알아 번제단에 기꺼이 오른 순종의 대명사 이삭도 눈이 어두울 만큼 늙고 총기가 둔해지자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장자선호로 그리스도의 길을 망칠 뻔했다. 이스라엘의 용사 기드온, 삼손의 말로는 타락의 전형이었고,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도서를 쓰고서도 자신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밤새도록 나열해도 모자랄 실패담으로 가득한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질그릇 안의 그리스도만 오직 보배임을 알려 주는 책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사람들은 도피처를 꿈꾼다. 가공의 내용임을 알면서도 별의별 능력자들이 등장하는 히어로물이 엄청난 인기를 끈다. 극단의 현실부적응을 보이고 방에만 틀어박혀 게임·애니메이션에 빠져 사는 이른바 ‘히키코모리’ 세계에서 이들 세상의 주인공은 완벽한 히어로이고 그 공간에서는 절망이 없다. 특정 인물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른바 ‘팬덤(fandom) 현상’도 연장선에 있어 지지하는 이의 명백한 부정(不正)이 드러나도 지지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팬덤 정치인, 종교지도자,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일 뿐이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나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힘에 지나도록”의 원문 ὑπέρ δύναμις(우퍼 뒤나미스, over ability)를 직역하면 ‘능력 초과’다. 즉 ‘압력이 내 능력을 초과해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쪽지시험에서 40점 받은 초등학생의 절망감이 대입시험에 낙방한 학생의 절망에 비해 적다 할 수 없고, 어떤 이의 백만 원은 다른 이의 백억 원보다 클 수 있다.


따라서 고난이나 성공의 크기를 무시함도 자랑함도 의미 없다. 세상에서 성공한 크리스천, 눈에 보이는 업적을 쌓은 목회자의 간증은 큰 은혜가 되지만 그 무용담과 업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자기 능력을 넘어선(ὑπέρ δύναμις) 상태에서 부활의 산소망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매달렸는지를 발견하는 은혜만이 고난의 천로역정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를 알기에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고 했다. “하나님을 바라라”(시42:5,42:11,43:5)의 원문을 의역하면 “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라”다. 어차피 ‘내 능력’은 한도 초과니 심통 부리지도, 팬덤 짓도 말고 겸손히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 마음의 무릎을 꿇자. 기도하자. 주님이 반드시 내 상황을 바꾸신다.




위 글은 교회신문 <704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