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히브리어에 ‘은퇴’라는 단어는 없다
유대인의 경제 교육

등록날짜 [ 2015-06-08 13:36:33 ]

죽을 때까지 일한다는 직업의식 투철해

<사진설명> 히브리어에는 은퇴라는 단어가 없다. 은퇴한 유대인 할머니들이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로 편지에 우표 붙이는 일을 하는 모습.

유대인 아버지들은 보통 아이가 세 살이 되면 경제 교육을 시작한다
. 이는 자녀들에게 먹고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강도로 키우는 것과 같다는 유대인 격언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경제 교육 덕분에 유대인은 세계에서 최초로 은행을 세웠고, 월스트리트를 개척했으며, 백화점 정찰제 같은 경제 기준을 만들어 냈다.


유대인은 율법 교육을 많이 한다. 그래서인지 머리(IQ)가 좋다. 그러나 율법을 공부할 때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한 채 법만 강조하면 인정이 메마르기 쉽다. 자신의 이익만 위하여 깐깐한 법을 남용하여 순진한 사람을 골탕 먹이는 교활한 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사랑 없는 율법 교육의 위험성이다.

직업은 곧 사명

최초의 인간은 입을 옷 하나를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까. 들에 가서 양을 사로잡아 그것을 키워 털을 깎고 그 털로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짜고 그것으로 다시 옷을 지어 입기까지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돈만 있으면 상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사 입을 수 있다. 옛날에는 한 사람이 하던 많은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옷을 입을 때도 내 수중에 옷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공정을 담당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 예화는 유대인의 직업관을 말해 준다. 내가 종사하지 않는 직업을 다른 누군가가 담당해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서로가 담당하는 직업을 존중해 준다.

히브리어에는 은퇴라는 단어가 없다. 따라서 유대인은 죽을 때까지 일한다. 유대인의 이런 직업의식은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의 사명과 자부심 또한 크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은퇴 시기는 언제일까?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예를 보자.

아인슈타인(1879~1955)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적이 있다. 그는 상대성 원리를 발표한 이후에 수많은 경쟁 학자가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도전에 시달렸다. 우주에 관한 그의 개념이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도 늙어 76세가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그때 그의 모습을 자세히 오랫동안 찍어 놓았다.

그는 옆에서 시중을 드는 비서 겸 간호인에게 손짓한다. 종이와 펜이 전달된다. 거기에 간간이 뭔가를 쓰고 지운다. 몇 자 쓰다가 기력이 떨어지면 다시 눈을 감고 쉬면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러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유대인의 직업 교육 덕분이다. 유대인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직업의식을 가르친다. 이런 직업의식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불후의 명작가가 많고 노벨상 수상자도 많이 나온다

직장 그만두면 자원봉사라도 해

왜 유대인에게는 은퇴라는 단어가 없는가? 그 답을 유대인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에서 찾아보자.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에 해당하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본다. 고대 히브리어의 원칙이다.

히브리어에 없는 개념 중 하나가 은퇴. 히브리어에 은퇴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은퇴라는 개념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원래 은퇴라는 단어는 1950년 전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은 장애인에 해당됐다. 따라서 유대인은 부득이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어디에선가 자원봉사로라도 일을 계속한다.

인간에게 언제 역동적인 힘이 샘솟는가? 인생이 나아갈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이를 위해 뭔가 할 일이 있을 때다. 직업을 갖고 현장에서 일할 때다. 이때 생의 의욕과 함께 에너지가 넘친다.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은퇴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이유는 대부분 할 일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대부분 육체가 늙어 수명을 다하여 죽기보다는 삶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죽는 이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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