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등록날짜 [ 2025-10-20 15:22:25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성품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사랑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의 형상의 모양으로 창조하셨으니,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에게 모든 만물을 주셔서 넉넉히 살게 하셨고, 인간의 영혼에게는 자신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이 살아가는 인간은 마땅히 감사와 찬양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살면서도 배은망덕하여 그가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고 생명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이것이 영육 간에 죽을죄인 것입니다(창3:13~19). 그때부터 인간은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받으며 살다가 죽은 후에 타는 불못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역사인 것입니다(요일3:8, 마25:41). 그러나 영육 간에 죽음과 참혹한 지옥 형벌을 세세토록 마귀와 함께 받아야 하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피를 흘리고 죽으셨으니, 이는 죄와 사망과 마귀역사로 말미암은 참혹한 지옥 형벌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신 것이요,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 인간의 형벌받을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했음을 믿는 자마다 성령이 구원을 보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 시인케 하십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할 사명자들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후사가 된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6~1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것을 성령으로 확증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죽기까지 배은망덕할 수 없는 것입니다(히6:4~6). 


초대 교인들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가 그랬습니다.

아담부터 유래된 원죄도, 또한 마음과 생각으로 범하는 어떠한 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고 회개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죗값을 이미 담당하셨기에 죄에서 오는 저주에서, 질병에서, 지옥 형벌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4~17).


그러나 속죄의 은혜를 받고도,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고도, 천지 만물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거나 망각한다면 구원의 주님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며 아담과 같이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도 본인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 없이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은혜 안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면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6~29).


또 죄와 사망과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작든 크든 육체의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료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은혜에 감동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과 행동도 없다면 주님은 실망하시고 돌아오라고 책망하십니다(눅17:12~19).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자요 조물주이심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이 죄 아래서 참혹한 지옥 형벌을 세세토록 받을 자임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행자지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존재인 것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모르고 결국은 속죄의 은혜도 모르고 천지 만물로 살아가는 것조차도 모르며 오로지 과학문명만 신봉하다가 최후에 그 영혼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육체로 살다가 죄 아래서 멸망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5~8).


살기 위하여 감사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주셔서 우리는 육신이 살고 있는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영생과 천국을 은혜로 주심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못 박아 대속의 피를 흘리며 살 찢고 피 흘려 죽게 하셔서 죄와 사망과 타는 불못인 지옥 형벌에서 내 영혼을 구원해 주신 것과, 우리가 영생과 천국을 은혜로 받았음을 성령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고 경험으로 확증하지 아니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합시다.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나의 몸도 드리고 최상의 예물도 드리며 감사합시다. 이는 주님의 요구이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은혜를 모르는 자는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도 감사치 않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받을 형벌이 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2~23).


하나님은 왜 감사 절기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430년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으니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 내 영혼이 항상 기도할 수 있고 항상 생명의 말씀을 들으며 살고 있는 은혜, 복된 가정을 주신 은혜, 그 큰 구원의 은혜가 출렁이는 교회에서 구원의 주께 쉬지 않는 영적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은혜, 쉬지 않는 기도와 생명의 말씀과 회개와 성령 충만과 전도와 충성과 섬김과 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망각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사단·귀신 역사에 속아 육신의 생각과 소욕과 요구와 정욕으로 타락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는 재촉이 쉬지 않는 교회를 만난 것도 감사, 감사합시다.


탕자가 집을 나간 후 거지가 되어 죽음 직전에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하고 살기 위해서 돌아왔듯이, 하나님의 일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린 예수가족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감사를 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죽게 된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 과거에 아버지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온 탕자와 같이 살기 위해서 감사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만 가지 은혜로 영육이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생활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생활이요, 받은 은혜의 분량만큼 깨닫고 감사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영적생활인 것입니다. 배은망덕하는 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요, 감사를 모르는 자도 은혜를 모르는 자요, 은혜를 모르는 자는 구원의 믿음이 없는 자요,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요,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죄 아래서 멸망할 자입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이번 추석 연휴를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육신의 요구대로 허랑방탕으로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임을 인정하고 확증하기 위해서 내 영혼의 생명의 잔치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추수감사절성회에 참석해 생명의 말씀으로 주시는 큰 은혜를 받겠습니까? 엄히 선택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며 육신의 요구대로 살 것인가, 살기 위해서 영적생활 할 것인가, 선택합시다! 주님은 몹시 책망하셨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은 찾으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2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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