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를 전하여 영혼 살리자

등록날짜 [ 2013-10-01 10:08:41 ]

기독교는 혼자 도의 경지에 이르려고 믿는 신앙 아니야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해 그를 천국 가게 만드는 것


사도행전 1장 4~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영원히 멸망할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주가 되십니다.

가장 큰 명령, 전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은 대단히 웅장한 사건이요, 인류 역사에 단 한 번만 있었던 사건이요, 온 지구가 나서서 환영할 사건인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 백성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셔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삼일 만에 죄 없으신 증거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 사십 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인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성령으로 땅 끝까지 전하라고 마지막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예수께서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된 후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행1:9~11).

곧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애절한 부탁입니다. 주님의 이 마지막 부탁은 인류가 사느냐 죽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 부탁입니다. 이 부탁보다 더 절대적이고, 이 명령보다 더 다급하고 큰 명령은 없습니다. 이에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알지 못해 멸망하는 자들에게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일에 얼마나 열정을 다했는지, 미쳤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신의 생애 전부를 예수 증거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도 찾아다녔고, 그곳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구브로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서기오라는 총독이 최초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이어 서기오 총독의 고향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인연만 닿으면, 연관만 있으면 어디에든 쫓아다니며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에게도 예수에 대해 오해하는 점을 풀어 주려고 몸부림치는 바울에게서 구령의 열정이 넘쳐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지 못해 멸망하는 이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일러스트 박철호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전도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전도에는 위로는 주님 사랑, 아래로는 이웃 사랑이 동일하게 들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준다고 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의리가 없다면, 이는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주님을 향한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중심에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무슨 의리가 있으며, 그가 주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건지고 싶어 못 견디듯,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불타는 동시에 예수를 모르면 지옥 간다는 안타까움이 작용하여 기어이 그 사람을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나 혼자 도의 경지에 이르려고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또 이 땅에서 복 받아 부유와 권세를 누리려는 현세기복적인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가 구세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순간부터, 내가 이제까지 예수를 잘못 안 사실이 안타깝고 분하고 억울하여 예수 몰라 멸망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순간부터 복음 전도의 열정이 불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몰라서 멸망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 이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는 의리가 없는 자입니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수 있는 전도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수제자였습니다(마16:13~20).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예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셔도 베드로는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예수께서 가야바의 안뜰에 끌려가서 신문을 당하시면서 모진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 나서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작은 여종 앞에서 주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 일이지만, 실상은 베드로 자신이 매 맞기 두렵고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증거하지 못한 것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써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그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알지 못하여 오해하는 유대인들이 몹시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나아가 예수를 당당히 증거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너희는 예수를 죄 있다 죽였으나 그는 죄가 없다. 너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죽였지만 그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하고 외치자 듣는 이들이 “어찌 할꼬!” 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2:37~42).

주님 심정으로 복음 전하자
이와 같이 우리 마음속에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바로 일러 주고 싶은 마음, 베드로와 같은, 사도 바울과 같은 구령의 열정이 불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자로서 의리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대속하심으로 구원하신 그 큰 은혜를 오해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과 예수가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속에서 예수를 모르는 자들,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바로 전해 주고 싶은 의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이 의분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멸망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없다는 점입니다. 가슴 속에서 이런 마음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교회 다니다 끝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의리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분은커녕 감사도, 고마움도 없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야 하고, 복음을 더 전하지 못해서 안타까워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얼마인데, 그런 의분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날마다 승리하되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예수를 말하지 않고는 답답해서 못 견디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은 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주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소서! 바울 사도처럼 예수 증거에 미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윤석전 담임목사

위 글은 교회신문 <3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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