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말씀] 야고보서 강해 ①
두 마음을 품지 말라

등록날짜 [ 2009-04-28 14:04:57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믿음은 관계성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믿을 만한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잘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되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또한 확실히 믿었던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 때는 엄청난 허탈감과 분노가 찾아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관계나 어떤 입장에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혼할 때 누구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몰랐던 안 좋은 점을 보게 되면 ‘미리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신뢰가 깨집니다. 이렇듯 사람은 환경과 여건과 상황, 위치에 따라 계속 변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되십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결혼도 두 마음을 품은 자와 하게 되면 결국 깨지고 맙니다. 이 땅에서 몇 십 년 함께 사는 부부간에도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도 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성령 앞에 두 마음이 되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충성할 때도 처음 시작할 때 품었던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열심히 하던 기도가 나중에 가서 줄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하다가 힘들다고, 오해 받는다고 도중에 그만 두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다가 도중에 마음이 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다시 사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든 분량보다 억만 배 큰 영적인 소득이 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믿어 주시고 인정해 주심을 바라보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부장을 맡았을 때 다른 분들이 왜 그렇게 허구한 날 교회에 와서 기도하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왕 맡은 직분이라면 확실히 하나님 편에 서서 처음에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이 변치 않고 하나님 마음에 쏙 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든 충성이든 전도든 예물이든 무엇을 하든지 두 마음이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가져야 합니다.
새벽예배에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면 나가야 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서 영적생활이 좌절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유다가 두 마음을 품었다가 예수를 팔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이 두 마음을 품었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른 한 마음은 위선이요, 마귀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오시면 들림 받을 믿음, 환난의 때에 순교할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입니다. 돈 때문에 시험 들고, 부부간에 싸워서 시험 들고, 사업이 안 된다고 시험 들고, 저 사람이 기분 나쁘게 해서 시험 들고, 게으르고 나태해서 시험 들고, 날씨 탓하며 시험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두 마음을 버리고 신앙의 정절을 굳건히 지켜서 주님 오시면 들림 받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모두 응답 받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절대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당신 속에 두 마음을 품는 근성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새벽예배 나오겠다고 다짐하고는 왜 안 나오고, 성경 읽겠다고 다짐하고는 왜 안 읽습니까? 사람끼리도 두 마음을 품으면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두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위 글은 교회신문 <1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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